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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시장 위기에서 새 길을 찾는다/ <중> 소비자가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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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시장 위기에서 새 길을 찾는다/ <중> 소비자가 짓는다

입력
2010.08.23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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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냥갑은 안돼… 주민 눈높이 맞춰 '다품종 소량 생산'

#. 김중겸(현대건설) 사장과 최동주(현대산업개발) 사장의 공통점은 뭘까. 뿌리가 같고 이름이 비슷한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라는 점도 있지만, 두 사람은 건설업계 CEO 중 유달리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김 사장은 올해 신입사원의 10%를 철학이나 역사학 등 인문학 전공자로 채웠고, 최 사장은 주요 부서팀장과 인문학 전공자 중심으로 '컨텐츠&스토리텔링' 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 포드의 'T형'자동차. 1920년대 세계를 석권한 모델이지만, 경영학에서는 대량생산의 한계를 보여주는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상징이다. '값싸고 품질은 좋은데, 차별화가 안된다'는 불만이 나오자 당시 CEO인 헨리 포드는 이렇게 일축했다. '누구나 원하는 모델을 고를 수 있다. 원하는 게 'T형 검은색'이라면…'

하지만 신화는 10년도 안돼 무너진다. 30년대 다양하고 차별화한 차량을 선보인 GM에 무릎을 꿇은 이후 포드는 결코 GM을 앞서지 못하고 있다.

90년전 포드의 실패에도 불구, 국내 건설업체 대부분은 아직 공급자 위주 대량생산 방식의 경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짓고 나면 팔린다'며 고객 특성이나 사업성 분석 없이 전국에 아파트를 짓는 바람에 미분양 물량이 급증하고, 상당수는 자금압박을 받고 있다. 국내 최초로 한국 부동산 시장을 학문적으로 분석한 것으로 평가 받는 김수삼 전 한양대 부총장은 "과거에는 획일적 아파트라도 많이 공급하는 게 중시됐으나, 이제는 수요자의 다양한 요구를 맞추는 '다품종 소량생산'이 원칙이 됐다"고 밝혔다.

실제로 최근의 위기 상황에서도 높은 수익성을 유지하는 업체들은 '다품종 소량생산'흐름을 놓치지 않은 곳이다. 이들 업체는 다분히 인문학적 배경이 강한 마케팅 분석을 통해 '단순한 거주의 장소', '투기의 대상'에 머물던 주택에 자아실현 가치를 부여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짓고 팔리는 방식이 바뀐다

다품종 소량생산의 흐름은 아파트 건설 공정(工程)을 바꾸고 있다. 공학적 논리에 따라 효율적으로만 짓는 게 과거 방식이라면, 인문학적 코드에 따라 건물에 담길 스토리를 정한 뒤 공사하고 이후에도 입주자의 삶의 질을 관리하는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현대산업개발은 수원의 도시구획을 바꾼 '수원 I'PARK CITY'를 건설하면서 건물 외관을 각각 다르게 만들어 단지의 품격을 한 단계 높이고 있다. 세계적 건축가인 벤 판 베르켈의 사전 자문을 받아 건물 외벽을 숲과 계곡, 대지, 물의 파동 등을 모티브로 한 예술작품으로 꾸미기로 한 것. 회사 관계자는 "입주자들은 철학이 담긴 명품 아파트에 산다는 데 자부심을 갖게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현대건설도 수원 장안 힐스테이트 단지에 들어설 산책로를 220여년전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하며 걷던 능행길과 연관시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소비자의 체험과 동참을 '래미안' 브랜드 마케팅의 핵심 코드로 삼고 있다. 업계 최초로 98년 발족한 주부 자문단인 '주부21세기 주택위원회'는 월 2, 3회 정기모임을 통해 아파트 상품개발 및 아이디어 제안을 하고 있다. 최근 여배우 이미숙과 신민아를 내세워 선보인 체험 광고 역시 이런 맥락이다.

'진심으로 짓는다'는 광고로 유명한 대림산업도 인본(人本)적 아파트 설계로 신뢰를 쌓고 있는데, 대표사례가 경기 고양 원당 'e편한세상'을 '장애물 없는' 아파트로 지은 것이다. 주거동과 주민공동시설, 놀이터를 턱 없는 수평 보행로로 연결한 게 특징인데 사람의 통행편의가 높아진 만큼 차량은 단지 곳곳의 턱 때문에 거북 걸음을 해야 한다.

아파트 거래 방식에도 투기적 요소를 배제한 새로운 매매방식이 등장했다. 이른바 '반값아파트'가 그 것인데, 부산지역 중견 건설업체인 영조주택 윤호원 회장이 주택 소유권을 주거용과 투자용으로 나눈 비즈니스 특허를 출원했다. 윤 회장은 "비즈니스가 활성화되면 소유권을 자산신탁에 맡긴 뒤 그 지분을 증권화해 쉽게 사고 팔 수 있게 하는 것도 가능하다"며 "9월 중순 이후 수도권 인근 아파트 단지에서 실제로 이 모델을 적용하기 위해 막바지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단지-다른 아파트

입주자 취향에 따라 같은 단지라도 아파트 구조와 인테리어를 달리 설계한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롯데건설은 입주자가 맘대로 공간을 바꿀 수 있다는 취지에서 아파트를 '트랜스포머' 로 규정하는데, 소형 아파트 브랜드인 '캐슬 루미니' 는 30㎡ 의 공간을 2배 이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설계를 적용했다. 평소에는 평범한 벽과 바닥이지만, 벽에 붙은 문을 열면 침대, 옷장, 책장, 미니바, 테이블 등 다양한 가구로 변화된다.

또 한화건설은 보금자리 주택인 '별내 한화 꿈에그린 더 스타'도 로맨틱과 모던 스타일의 두 가지 방식으로 짓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입주자 선택에 따라 조명, 가구, 아트월, 패턴 유리 등 인테리어 주요 요소가 변경된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안재 수석연구원은 "일본에서는 100년 이상의 내구수명을 지니면서도 집주인의 라이프 사이클에 따라 구조를 수시로 바꿀 수 있는 SI(Skeleton & Infil) 공법이 인기를 얻고 있다"며 "주택의 유연성과 가변성을 높이는 게 미래의 흐름"이라고 말했다.

조철환기자 chcho@hk.co.kr

■ 남자 소변기 자연 채광창… 주부 아이디어가 설계부터 바꾼다

'남자 소변기', '변기 옆 스프레이건', '자연 채광창.'

다른 아파트에는 없지만 GS건설이 지은 '자이' 아파트 욕실에만 존재하는 것들이다. 이 아파트 욕실에 희한한 편의장치가 들어서게 된 것은 '아줌마 파워'때문이다. GS건설 관계자는 "2005년 6월부터 주부 자문단인 '자이엘(XIEL)'을 운영하고 있는데, 전문가도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있다"고 말했다.

주택사업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아파트라는 상품의 가장 직접적 소비자인 주부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업체마다 주부 자문단을 구성해 완공 아파트에 대한 사후 점검은 물론, 아파트 설계 및 공간배치에도 주부 의견을 반영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물산 건설부문이 최초로 주부 자문단을 운영한 이후 대부분의 대형ㆍ우량 건설회사가 주부 참여를 통해 아파트의 품질 향상에 주력하고 있다.

현대건설의 경우 주부 고객평가단인 '힐스테이트 스타일러(Hillstate Styler)'를 운영하고 있는데, 최근 3기 스타일러 8명이 새로 선발됐다. 이들은 1, 2기 스타일러와 마찬가지로 이 회사가 진행하는 상품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공 중인 힐스테이트 아파트 단지를 방문해 관련 서비스를 체험하고 평가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현대건설 이태석 홍보부장은 "지난해 스타일러 주부들이 낸 아이디어가 200건을 넘는다"고 소개했다.

2005년부터 주부자문위원단을 선발하고 있는 대림산업도 올해 60여명 주부를 새로 선발했다. 이들 주부위원들은 e편한세상 모델하우스 품평회 및 입주단지 고객 만족도 조사, 단지별 홍보행사 자문 및 모니터링 역할을 하게 된다.

SK건설도 지난해부터 전업주부 자문단을 온라인(http://creator.skec.co.kr)으로 공개 채용해 차별화된 주거상품 개발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고 있다.

전태훤기자 besame@hk.co.kr

■ "다품종 소량 생산 주택업계 넘어 연관산업도 영향"

주택업계의 패러다임이 1990년대 이전의 ‘대량생산’에서 벗어나 2000년대 이후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주택시장에서는 공급이 수요보다 만성적으로 부족해 ‘만들면 팔리던’ 공급자 우위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당연히 이 시기에는 경제성이 높은 획일적 아파트가 대량으로 공급됐다.

그러나 주택 보급률이 높아지고 업체간 기술과 품질이 평준화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주택 보급률이 95년 86%에서 2000년 96%, 2005년에는 106%로 빠르게 증가하고, 주택업체간 경쟁이 치열해 지면서 경쟁우위를 확보하고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브랜드, 디자인 등이 아파트 경쟁력의 핵심요인으로 부상했다.

최근에는 주택가치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도 투자 수단에서 주거만족, 삶의 질 등으로 점차 이동하고 있다. 과거에는 ‘붕어빵’식으로 똑같은 아파트를 많이 만드는 대량생산 방식이 유효했으나, 이제는 소비 계층별로 특화된 ‘다품종 소량생산’이 주택업계의 새로운 화두가 된 것이다. 효율적 건축은 기본이고 소비자의 라이프 스타일과 니즈에 맞는 주택을 공급하는 것이 주택업계의 핵심 역량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추세는 주택업계뿐 아니라 다양한 연관산업에도 변화를 요구한다. 예컨대 1~2인 소형가구가 증가함에 따라 소형 빌트인 가전ㆍ가구 시장이 확대되고, 보안경비, 가사대행 서비스 등 서비스 분야에서도 참신한 아이디어를 무기로 한 창업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안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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