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 도시후미(阿蘇敏文)라는 일본인 목사를 알게 된 건 4년 전이다. 일본 연수 중 유학생 소개로, 한국에서는 거의 인연이 없던 교회를 나가면서부터다. 한국 교회 진출이 왕성한 도쿄(東京) 신주쿠(新宿)구 오쿠보(大久保) 지역에 조그만 일본 교회가 있다. 아소 목사는 이 교회의 직전 담임목사였지만, 목사로서보다 농업 강사로, 일본계 필리핀인 2세를 지원하고 외국인 난민의 일본 정주를 돕는 시민운동가로 더 기억에 남는다.
외국인 난민 돕던 시민운동가
그는 일본의 유명 입시학원 중 하나인 가와이주쿠(河合塾)에서 운영하는 고졸검정시험 대비반 '코스모'의 농업담당 강사였다. 코스모는 주로 등교거부 학생이나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등 고등학교를 중도에 포기한 학생들을 위한 코스다.
아소 목사는 1988년부터 2년간 강의실에서 세계의 식량문제를 가르쳤고, 이후는 남에게 빌려서 일군 논ㆍ밭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직접 농사를 지었다. 검정 대비 수업도 중요하지만 저마다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자연과 사람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는 것도 소중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가 이사장이었던 'JFC네트워크'는 일본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인 일본인이 친자 관계를 인정치 않아 곤경에 처한 일본계 필리핀인 2세 문제 해결에 나선 시민단체다. 일본에 오랫동안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불법 체류로 추방 선고를 받고 가족이 생이별할 위기에 놓인 쿠르드, 스리랑카, 미얀마 난민들도 적극 도와왔다.
미쓰비시(三菱)광산의 기사였던 아버지의 조선 근무로 일제강점기 함북 청진에서 태어난 아소 목사는 교회를 통한 한일관계 개선에도 열심이었다. 3년 전 재미 일본인 작가의 자전소설 가 한국에서 논란이 됐을 때 그는 한국 신문 기고에서 종전 직후 부산을 경유한 자신의 귀국 길을 이렇게 회상했다. "소련군 수용소에서 탈출한 일, 겨울 산에서 배곯아 죽은 내 여동생, 메주 만드는 농가에서 어렵사리 얻어먹은 뜨끈뜨끈했던 삶은 콩, 소련군 총격에 정신 없이 도망치다 미아가 돼 산 속을 헤맸던 기억, 기차가 멈춰서 버려 두려움에 떨며 철교 위에서 보낸 밤."
이어 "피난길에선 누구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을 것"이라면서도 "그런데 난 부모님에게서 단 한 번도 한국인에 대한 험담을 듣지 못했다. 한국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 가족은 귀국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가 식민지 지배와 전쟁 책임을 먼저 반성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최근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에 열심인 일본 시민운동가, 학자들을 만날 기회가 적지 않았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방패막이 삼아 일본 정부가 피해가려는 전후 배상 등 숱한 한일문제는 이런 일본 지식인과 시민운동가, 종교인들의 지원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최근 일본 총리가 담화에서 언급했듯 "아픔을 준 측은 잊기 쉬운 것"이 인지상정이란 걸 생각하면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일관계 개선에도 많은 기여
아소 목사가 가을 수확기 논에서 벼를 수확한 뒤 아이들에게 늘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여러분이 소망을 담아 심은 모종 하나에서 2,000알 이상의 열매가 맺힌다." 깨어 있는 일본 시민 아소 도시후미는 지난달 31일 지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활동이 한일관계 개선에도 거름이 됐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김범수 도쿄특파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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