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말 퇴임하는 크리스토퍼 힐 이라크 주재 미국 대사는 최근 33년간의 외교관 생활을 접는 고별 기자회견에서 “이라크 문제가 북한 문제 보다 더 쉬울 것”이라고 촌평했다. 주한 대사와 북핵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 등을 역임, 우리에게도 친숙한 그는 두 사안을 비교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자격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전에 힐 대사는 이라크 임무를 “가장 두려운 도전”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라크에서는 “쉬운 것이 어렵고, 어려운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란다. 결국 북한 문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세계의 난제 중 난제인 셈이다.
힐 대사의 현실 인식을 좀 더 따라가 보면 북한 문제 해결 난망의 이유를 대략 간추릴 수 있다. 그는 앞서의 회견에서 “북한에 대한 개혁 요구는 그들에게 파괴되라고 요구하는 것”이라며 북한은 붕괴 공포 때문에 개혁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을 보였다. 또 일부 보도에 따르면 힐 대사는 근래 한 사석에서 북한의 핵 포기 가능성에 회의적 입장을 피력했다고 한다. 6자회담 대표 시절 접했던 그의 정치적인 ‘대(對) 언론용’발언에 비하면 이런 솔직한 변화는 우리에겐 상당히 실망스러운 것이다. 결론적으로 ‘핵을 움켜쥔 채 한사코 개혁ㆍ개방을 거부하는 북한’의 미래는 힐 대사의 표현대로 ‘매우 흐림’일 수밖에 없다.
힐 대사는 이렇게 암울한 진단만을 내린 채 더 나아가려 하지는 않았다. 의당 뒤따를 수밖에 없는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공란으로 남긴 것이다. 그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국내 전문가들의 해법은 그들이 처한 이념적 위치에 따라 “햇볕을 더 비춰야 한다”, “꼭꼭 틀어막고 본때를 보여야 한다”,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함께 써야 한다”등으로 대별된다. 주장하는 이마다 목소리는 높지만 어떤 것이든 현실에서의 검증을 통과하지 않으면 이념과잉만 남을 뿐이다.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과거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제까지의 북한 문제 대처를 총체적 실패라고 보고 매 고비마다 실패로 끝나버리게 된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는 얘기다. 다시 힐 대사로 돌아가면 그는 지난 18일 한 방송 인터뷰에서 자신이 주도했던 북핵 6자회담 협상에 대해 “북한 비핵화의 진전은 최소한 서류상으로는 달성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나아가 “2008년 이뤄진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 폭파는 이후 지금까지 북한의 원자로 가동을 막는데 기여했다”며 “그들은 일부 핵물질을 갖고 있지만 최소한 매일 추가적 핵물질을 생산하지는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누구든 자신이 관여했던 일을 긍정적으로 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그러고 말기에는 우리에게 북한 문제는 너무 중차대하다. 굳이 지적하자면 ‘서류상 달성’운운은 우리를 낙담케하는 난센스이고 ‘냉각탑 폭파’에 대해선 당시 미 국무부에서도 수명이 다한 시설을 활용한 TV용‘쇼’라는 얘기가 나왔었다. 또 북한은 6자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진 이후 사용후 핵연료봉을 재처리해 핵무기 제조에 쓰이는 핵물질인 플루토늄을 추가적으로 확보했다. 고농축우라늄(HEU)을 얻으려는 북한의 제2 핵물질 플랜도 현재진행형이다. 우리가 떠나는 힐 대사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설픈 억지 성공담이 아니라 진지하고 책임감 있는 실패담이다. 학자로 변신하는 힐 대사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바란다.
국제부장 고태성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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