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양가 내리고 중소형 늘리고… 非常건설사 '비상구' 찾다
#1. 대우건설이 최근 서울 신천동에서 선보인 오피스텔 ‘잠실 푸르지오 월드마크’(89실)는 주택경기 침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높은 49대1의 청약경쟁률로 마감됐다. 신혼부부 등 1,2인 소형가구의 주택임대 수요가 늘어난 데 착안, 안정적인 임대수익을 노리는 투자자들을 위해 중소형 상품을 내놓은 것이 주효했다. 여기에 3.3㎡ 당 2,000만원이 넘는 주변 아파트 시세보다 싼 3.3㎡ 당 1,500만원대의 분양가는 폭발적인 시장 반응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2. 지방 미분양 문제로 건설업계가 한창 골치를 앓던 지난 4월, 쌍용건설은 부산 장전동에서 순위 내 청약기간 100%에 가까운 청약률을 기록하며 업계를 놀라게 했다. 수도권에서조차 청약률 제로 단지가 나오는 시장 침체 속에서, 그것도 ‘미분양의 진원지’ ‘건설사의 무덤’이라 불리는 지방에서 선전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설계변경. 당초 514가구 모두 전용 85㎡ 가 넘었던 중대형 설계를 완전히 틀어, 81%를 중소형으로 변경한 덕에, 대부분 순위 내 청약을 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건설업계의 콧대는 높았다. ‘내가 지으면 무조건 팔린다’는 확신도 가득했다. 실제로 분양가가 얼마든, 넓은 아파트든 작은 아파트든, 소비자들은 사줬던 것이 불과 얼마 전까지의 우리나라 주택시장이었다.
하지만 이젠 변했다. 달라져도 제대로 달라지고 있다. 냉정해진 시장과 수요자 앞에 건설사들도 겸손해지고 있다. ‘지으면 대박’이란 낡은 믿음을 접고,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춰가다 보니, 건설사도 시장도 뜻밖의 돌파구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욕심을 버리고 시장을 얻다
자의든, 타의든 건설업계가 시장에 수긍하게 된 것은 분양시장의 침체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시장이 얼어붙기 시작하고, 이 냉각기가 좀처럼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건설사들도 새롭게 시장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시장부진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침체가 생각보다 길어졌고, 점차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단순한 부동산 경기하강이 아니라, 부동산불패나 중대형 선호와 같은 오랜 신화가 깨지고 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지으면 대박이 나던 게 불과 2,3년 전의 일인데 이 짧은 기간 동안 시장이 이렇게까지 확 바뀔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거지요.” (한 대형건설사 임원)
시장이 변했고, 건설사들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집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컨대 ▦현대건설이 최근 ‘반포 힐스테이트’를 주변 시세보다 20% 가량 낮은 가격에 선보인 것이나 ▦앞서 삼성물산이 역삼동 진달래2차를 재건축한 ‘래미안 그레이튼’을 주변 시세(3.3㎡ 당 2,773만원) 보다 낮은 3.3㎡ 당 평균 2,769만원에 내놓아 1순위에 마감한 것 등이 그런 경우다. 과거 공급자 위주의 시장에선, 특히 강남권 청약시장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례인데, 어쨌든 시장에 적응하면 침체된 시장에도 수요는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 좋은 케이스다.
박원갑 스피드뱅크 연구소장은 “최근 강남권에서도 고분양가 단지들이 장기 미분양으로 남아 있는 만큼, 건설사들도 강남이라고 해서 전과 같은 고분양 폭리는 기대하기 어려워졌다”며 “합리적인 분양가로 소비자들에게 다가서는 것이 미분양 리스크도 줄이고 시장의 신뢰도 얻는 길”이라고 말했다.
바뀐 시장을 읽다
요즘 주택시장에선 중소형이 대세다. 발코니 확장이 합법화된 이후로 통상 30㎡ 가량 실내면적을 넓힐 수 있게 되면서 수요자들이 전용 85㎡ 이하 주택으로 집중되고 있다. 총부채상환비율(DTI) 적용으로 대형 아파트에 대한 구매력이 크게 줄어든 것도 중소형 인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1,2인 소형 가구의 급증이란 시장수요 변수도 건설업계가 중소형 주택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요인이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에 따르면 6월 현재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43.3%를 차지하는 1,2인 소형가구는 2020년 47.1%, 2030년이면 51.8%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이런 추세 탓에, 이윤이 적다며 중소형 주택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대형 건설사들마저 이젠 소형 주택시장에서 침체의 돌파구를 찾고 있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인구감소, 핵가족화 등으로 시장의 축이 이미 중소형으로 바뀌었는데, 건설사들만 중대형을 고집하다가 결국 지금의 시장침체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올 하반기 용인 성복동에서 분양을 앞두고 있는 현대산업개발은 전용 126~167㎡ 256가구로 계획됐던 설계를 전용 84~124㎡ 351가구로 바꿔 공급키로 했다. 주변의 미분양이 모두 130㎡ 이상의 중대형이란 시장상황이 감안된 것.
롯데건설은 지난해 소형 주택 브랜드 ‘롯데캐슬 루미니’와 관련 설계를 개발하고, 현재 서울 도심 역세권을 중심으로 사업지를 물색 중이다. 손은경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국내 소형주택은 도심형ㆍ소형임대형ㆍ고령자 전용주택 등 다양한 유형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건설업계는 이에 따른 새로운 영업 기회를 모색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우건설 관계자는 “소형 주택은 회사 이윤이 많지 않지만 1,2인 가구 중심으로 바뀌는 주택시장의 트렌드 변화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앞으로 중소 건설사는 물론, 대형사들도 틈새시장 창출을 위해 개척해야 할 시장”이라고 말했다.
전태훤기자 besame@hk.co.kr
■ '강남 중대형 브랜드 불패' 옛말 수요자 눈높이 맞추기 마인드로
2007년 분양 당시 최고 분양가(3.3㎡ 당 3,387만~3,395만원)에 공급됐던 서울 서초동의 한 대형 주상복합. 작년 6월 입주를 시작했지만 아직도 주인 없는 빈 집이 적지 않다. 최근 무려 4억원 이상씩 깎아준 덕에 조금씩 팔리고는 있지만 아직도 미분양 숙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송도신도시에서 1,494가구를 선보일 예정인 포스코건설은 벌써 몇 차례나 분양일정을 연기했고 올 하반기까지 미룬 상태지만 이마저도 불확실하다. 한때 수도권 청약열기의 대표 현장이던 곳에서, 더구나 대형건설사의 브랜드를 내건 아파트지만 시장의 외면을 두려워하고 있는 상황이다.
부동산호황을 이끌었던 3가지 불패(不敗) 신화는 지금 철저하게 깨지고 있다. 강남을 비롯해 서울 수도권 요지에서, 유명ㆍ대형건설사가, 넓은 평형으로 지으면 무조건 팔린다는 ▦강남불패 ▦브랜드 불패 ▦중대형불패 현상은 이제 그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부동산 부진이 경기등락에 따라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통상적인 침체가 아니라, 시장의 구조와 흐름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 베이비부머의 은퇴, 1ㆍ2인 가구의 증가 등 우리나라 경제ㆍ사회구조가 급속히 바뀌면서 주택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이 같은 변화가 지난 오랜 버블을 차츰 걷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관련기사 7면
바뀐 시장의 흐름은 건설사들의 변화를 재촉하고 있다. 짓기만 하면 무조건 팔렸던 ‘공급자 시대’에 익숙해있던 건설사들도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눈높이를 소비자와 시장에 맞추기 시작했다.
우선 가격파괴. 지난달 현대건설이 반포에서 분양한 ‘반포 힐스테이트’ 397가구는 주변 시세보다 20% 가량 저렴한 3.3㎡ 당 2,670만~3,180만원에 공급됐고, 그 덕에 1순위에서 평균 경쟁률 8대1이 넘는 청약열기로 이어졌다.
트렌드에도 민감해졌다. 앞서 대림산업이 경기 광교신도시에서 1순위 경쟁률 10.42대1의 청약대박을 낸 것은 친환경ㆍ저에너지의 흐름을 파악하고 시장을 만들어낸 사례. 에너지 사용량을 50% 이상 절감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저에너지 주택을 선보임으로써, 1,970가구 모두 전용 100㎡가 넘는 중대형으로 설계된 핸디캡까지 극복한 것이다.
과거 같으면 아파트가 안 팔려도 그대로 움켜쥔 채 정부의 대책만 바랬을 터. 하지만 이젠 브랜드ㆍ지역 프리미엄을 버린 채 가격을 낮추고, 눈높이를 수요자에게 맞췄더니 없을 것 같던 시장이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김동수 한국주택협회 정책실장은 “최근의 위기는 분명 힘겨운 상황이지만 오히려 시장을 다시 보고 체질을 바꿔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분양가상한제 철폐나 총부채상환비율(DTI)규제 완화 등도 결국엔 근본대책이 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위기를 변화의 동력으로 삼는 기업만이 앞으로 시장을 주도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김현아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 건설업은 우선 주택시장에서 ▦수요의 양적 팽창 ▦획일화된 대량생산 등에서 탈피해야만 위기극복 물론 새로운 성장의 문턱에 들어서게 될 것”이라며 “더 나아가 안정적 경영환경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현금 유입이 가능한 토목 등 관급공사와 고부가가치 해외 플랜트 등으로 공종을 다각화해 시장 스펙을 늘려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전태훤기자 besame@hk.co.kr
■ 전문가 제언 "사회 문화등다각적 시장 분석 필요"
부동산 시장 침체가 지속되면서 늘어난 미분양 및 미입주 물량이 건설업계의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2007년 재도입한 분양가상한제를 피하기 위해 당시 밀어내기식으로 쏟아냈던 물량들은 건설업체들에게 미분양의 독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단기간의 공급물량 집중에서 시작된 건설업계의 위기는 이미 예견됐던 결과다.
문제는 이런 가격 하락 추세가 단기간에 그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건설사들도 이젠 시장위기의 원인을 정확히 분석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실수요를 기준으로 보면 향후 신규수요는 크게 증가하지 않을 것이다. 신규 개발 시장보다는 도시재생사업이나 유지보수 시장이 커질 것이다. 새로운 택지개발사업보다는 재건축, 재개발, 리모델링 시장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앞으로의 사업 전략도 가격 상승을 기대하는 투자 수요에 의존하기보다는 실수요에 초점을 맞추는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 분양가를 낮출 수 있는 다양한 주택공급 방식을 찾아야 하고, 필요하면 분양 제도도 개선해야 한다. 수요와 리스크 분석 능력을 키워야 함은 물론이다.
작금의 시장 위기는 근본적으로 건설업계의 시장분석 능력이 부족한 테에서부터 비롯됐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선진 건설업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역시 경제․ 사회․ 산업․ 문화 등 광범위하고 다각적인 건설환경 분석 능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경제환경에서, 부동산과 주택ㆍ건설에 국한된 단편적인 분석만으로는 정확한 시장 수요를 읽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김선덕 소장 건설산업전략연구소
■ 건설현장이 똑똑해진다
건설현장이 똑똑해지고 있다. 이리 저리 널브러진 공사자재에, 어디에 어떤 자재가 얼마나 쓰였는지 한번에 확인하기 힘들었던 현장은 사라지고, 실시간으로 일목요연하게 컴퓨터로 전산 관리되는 ‘스마트 현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업계가 IT기반의 현장관리 시스템을 속속 도입하고 있는 것은 원가절감 차원. 어려워진 건설 경기 속에서, 고분양가 폭리를 버린 대신 원가절감을 통해 수지 극대화를 꾀하려는 건설업계의 움직임이 첨단 IT 기술로 무장된 현장관리 시스템과 3차원입체(3D) 현장설계, 스마트폰을 이용한 모바일 오피스 구축 등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GS건설은 2006년 업계최초로 건설사업총괄관리시스템인 TPMS(Total Project Management System)를 개발, 모든 현장에서 활용중이다. 공사현황과 현장 재무ㆍ자재 관리 등을 실시간으로 통합 관리하는 이 시스템 덕분에 GS건설은 불필요한 공정을 전에 비해 절반 가량 줄였고, 철근가공 비용에서만 연간 190억원을 절약하고 있다.
쌍용건설은 올 3월 서울 회현동 오피스 신축 현장에 업계 최초로 3D 설계기법인 BIM(Building Information Modeling)을 도입, 기존 설계 때와 비교해 기초공사에서만 약 10%의 비용을 줄였다.
대우건설과 대림산업은 모든 업무가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실시간으로 이뤄질 수 있는 스마트폰 기반의 모바일 오피스 구축에 나섰다. 업무효율은 높이고, 원가는 줄이는 데에는 움직이는 사무실 역할을 하는 스마트폰이 제격이라는 판단에서다.
건설업계의 원가절감 노력에 박자를 맞추기 위해 건설 단체도 팔을 걷어 부쳤다.
대한건설협회는 B2B 전자상거래 전문업체인 비즈셀프와 제휴를 맺고 협회 회원사를 위한 사이버 할인 공동구매 시스템인 ‘콘스몰’을 도입, 운영중이다. 이 온라인 장터를 이용하면 평균 5%의 할인에 평균 1.5%의 적립금 혜택까지 쌓을 수 있다.
조철환기자 choch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