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59> 송인상 회장과 남덕우 총리와 나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59> 송인상 회장과 남덕우 총리와 나

입력
2010.08.16 12:00
0 0

송인상 회장과 남덕우 총리는 내가 존경하는 분들이다. 사회적인 존경도 받고 많은 복도 타고 난 분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도 저렇게 되었으면 하고 생각할 것이다. 송 회장은 1914년생이고 남 총리는 1924년생이니 나보다 송 회장은 22살 남 총리는 12살 많다. 이 두 분과 나 사이에 얽힌 일화가 있다.

한국은행에서는 창립기념일과 같은 행사가 있을 때 총재를 지낸 분들만 헤드 테이블에 모시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 때문에 예컨대 송인상 회장 남덕우 총리 김정렴 실장처럼 총재는 하지 않았지만 훌륭한 한은 출신 선배들이 소외되는 경향이 있어 이를 시정해야 하겠다고 느꼈다. 그래서 내가 총재로 부임한 뒤의 모든 행사에는 총재경력 유무에 관계없이 훌륭한 선배들을 직접 챙겨 모신 결과 모든 분들이 적극 참여해 주셨다.

그런데 2002년의 어느 날 나는 송인상 회장 문상철 은행감독원장 김정렴 실장 남덕우 총리 하영기 총재 등 10여 분의 선배 원로들을 오찬에 초대하여 고견을 듣기로 하였다. 그런데 연세가 비슷한 것 같아 누구를 주빈석에 모셔야 할지 알 수 없어 생년월일을 알아보도록 한 결과 송인상 회장이 가장 연상이라고 해서 그분을 주빈석으로 모셨다.

그런데 식사도중 남덕우 총리 말씀이 6.25전쟁 때인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한국은행 입행시험에 응시했는데 그 때 송인상 회장이 한은 부총재로서 구술시험관 이었다는 것이었다. 그 때 시험에서 FOB(무역에서 배에 선적만 해주는 조건의 수출가격)가 무엇이냐고 묻는데 모른다고 할 수는 없고 그 때가 전시여서 엉겁결에 fight on battle(전장의 전투)이라 대답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틀렸다는 것을 알고 떨어졌다 생각했는데 합격이 되었더라고 말해서 한바탕 웃었던 일이 있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나이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두 분의 관계가 한은 부총재와 한은 입행시험 응시생의 관계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송인상 회장에 대해서는 나의 대학 생활을 얘기할 때 잠시 언급한 일도 있지만 나와는 각별한 관계였다. 송 회장은 내가 대학 1학년 때인 1955년 11월 10일 서울 상대 강당에서 한국은행 부총재로서 IMF 연차총회에 다녀온 뒤 세계금융정세에 대해 강연을 했다. 훤칠한 키에 서울 상대 선배이기도 한 그 분의 강연을 듣고 나도 저런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생각했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내가 경제학 교수가 되었을 때 능률협회장이신 그 분은 내 강의를 늘 좋게 평가하여 나를 협회의 단골강사로 초빙해 주셨다. 마침 그 분의 큰 사위 이봉서 장관이 나의 대학 동기여서 지금까지 더욱 친근감을 느껴왔다.

송인상 회장과 남덕우 총리의 관계에 대해 듣고 나서 나는 남 총리와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한은 조사부의 대리급 조사역이었을 때 당시 재무부 장관이던 남 총리의 정책비서 역할을 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앞에서 밝힌 바 있었다. 당시 남 장관은 필요할 때 자료를 찾아주고 정책안이 나오면 이를 검토해서 보고 할 수 있는 사람을 당시 김성환 총재에게 부탁했고 김 총재가 나를 천거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은에 근무하면서 1970년 전후 1,2년간 남 장관이 부르면 찾아가 도와 드렸다.

1970년 크리스마스 때였다. 재무부의 연초 대통령에 대한 업무계획보고 준비를 위해 남 장관 내외분이 일 보따리를 들고 워커힐의 단독빌라에 들어가면서 우리 내외를 그 곳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 동안 일만 시켰으니 호강도 좀 시켜주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아내는 당황하는 것이었다. 당시 얼마 안 되는 월급으로 네 남매를 기르느라 힘겨워했던 아내는 옷은? 그리고 핸드백은? 하고 걱정하는 것이었다. 결국 언니의 핸드백을 빌려 들고 가서 남 장관 내외분과 같이 생전 처음으로 워커힐 쇼도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도 맛 볼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먼저 전화로 문안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당시 한은 총재 비서실에 근무하고 있던 동서 조경호 씨에게 문의했던 기억이 있다.

이러한 남 총리와 나의 관계를 생각하면 내가 이 분을 모시고 점심을 대접한다는 그 자체가 감회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송인상 회장과 남덕우 총리와 내가 이 자리에 같이 있다는 것이, 더구나 어찌 보면 같이 늙어 가는 모습으로 있다는 것이 특별한 시대적 의미가 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우리는 각각 열 살 남짓의 터울이지만 사회적으로는 3대의 관계라 할 것이다. 인생 한세대는 30년이라 하는데 우리의 사회적 한 세대는 불과 10년 정도였으니 사람의 생물적 변화보다 사회적 변화발전이 얼마나 빠르게 진행되었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앞으로 다시 오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이런 현상은 30대 40대에 장관도 하고 군 참모총장도 되는 시대에 가능한 것이지 앞으로의 성숙 사회에서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서 대통령자문 국민원로회의가 출범했는데 여기서도 이 두 분을 만나게 되었다. 9명의 경제분과위원 가운데 송인상 회장과 남덕우 총리와 내가 함께 들어 있어 사회 3대가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이 두 분이 내내 건강하셔서 이렇게 자랑스럽고 앞으로 있기 어려운 사회 3대의 노익장이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기도하고 싶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