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종 머물던 중명전은 외교권 강탈당한 '아픈 역사의 장소'
서울시청 앞에서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정동극장 왼쪽 골목으로 들어서면 2층짜리 서양식 건물이 나온다. 구석진 곳에 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이 건물이 1896년 고종이 경운궁(덕수궁의 원래 이름) 내에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도서관으로 세운 중명전(重明殿)이다.
중명전 동쪽으로는 주한 미국대사관저가 널찍하게 자리잡고 있고, 서쪽과 남쪽에는 정동극장, 예원학교 등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다.
경운궁이 확장될 때 가장 먼저 궁궐로 편입된 중명전 일대는 수옥헌(漱玉軒)이라 불렸다. 중명전을 중심으로 10여 채의 전각이 있었다. 경운궁과 중명전 사이에는 이미 미국공사관이 자리잡고 있었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 덕수궁 돌담이 생겨 마치 별궁처럼 되었다.
경운궁에 일본인의 방화로 큰 불이 난 1904년 고종 황제가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중명전은 대한제국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인 시기에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는 무대가 되었다. 일제가 러일전쟁 승리의 기세를 타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늑약이 1905년 11월 이 곳에서 체결됐던 것이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 이미 그 해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의 승인을 받았고,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으로 영국의 승인을, 9월에는 러일강화조약으로 러시아의 승인을 확보해두었다.
중명전 2층 큰방. 고종이 신하들이나 외국 사절을 접견했던 곳이다. 지금은 복원공사 중이라 텅 비어있다. 1905년 11월 15일 고종은 이 곳에서 일본의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를 접견했다. 이른바 ‘보호조약’ 체결을 요구하는 천황의 친서를 미리 전달해 놓은 이토는 대한제국의 외부를 폐지하고 모든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할 것을 요구하는 조약안을 내놓고 인허를 요구했다.
고종은 일본의 감독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외교권을 행사하는 독립국이라는 형식만은 유지토록 해줄 것을 요청했다. 고종은 이러한 형식을 유지할 수 없으면 오스트리아에 병합된 헝가리나 열강의 식민지가 된 아프리카 토후국과 같은 처지가 된다면서 거부했다. 그러나 이토는 대한제국이 조약을 거부한다면 더 곤란한 처지에 놓일 것이라고 협박했고, 고종은 대신들의 뜻을 물어보아야 한다고 응수했다.
이토는 이튿날 대신들을 자신의 숙소인 대관정(大觀亭ㆍ대한제국의 영빈관으로 지금의 웨스틴조선호텔 대각선 맞은편)으로 불러 보호조약 체결에 찬성할 것을 요구했으나 아무도 찬성을 표하지 않았다. 17일에는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겐조가 나서 대신들을 설득했으나 역시 찬성하는 이가 없었고 황제에게 상주해 의견을 듣는 방법밖에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 날 오후 들어 일본군들이 정동 골목과 중명전을 에워싼 가운데 어전회의가 열렸다. 고종은 이토에게 궁내부대신을 보내 대신들이 조약에 반대한다며 협의의 확정을 유예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이토가 달려와 고종에게 알현을 요구했지만 고종은 신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이토는 퇴궐하려던 대신들을 불러놓고 밤 늦게까지 일일이 조약 체결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의사를 물었다. 찬성자는 2명뿐이었지만 이토는 이를 뒤집어 6대2의 다수결로 조약이 가결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고종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일본인 관리와 병사를 보내 외부대신 직인을 탈취, 조약문에 날인했다. 18일 새벽 1시30분께였다. 김지형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연구원은 “이렇게 강제로 늑약이 이뤄진 장소가 중명전의 어느 방이었는지는 아직 정확한 고증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외교권 이양을 다루는 조약에는 황제의 비준서가 반드시 첨부되어야 하지만 이 조약에는 외부대신의 직인만 찍혀있을 뿐이다. 그러나 일제의 강압으로 이후 대한제국의 재외공관들은 철폐되고 외교관들도 철수하고 말아 외교권은 일제에 넘어가고 말았다.
고종은 을사늑약 후 수교국가들을 상대로 조약 무효화 운동을 조심스럽게 전개했다. 1906년 6월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를 조용히 불러 ‘친서전달 특별위원’으로 임명하고, ‘1905년 11월 18일 대한제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조약은 불법, 무효임을 선언한다’는 친서를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대한제국과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한 9개국 국가 원수에게 전달하도록 밀지를 내렸음이 후에 알려지게 된다.
중명전이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1907년 6월 헤이그 밀사 사건 때였다. 고종은 이곳에서 이준, 이상설, 이위종 3명의 특사를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파견해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작전을 지휘했다. 고종의 외교전략은 헤이그 평화회의 정식 참가, ‘국제 분쟁 평화적 처리 조약’의 가맹, 이 조약의 가입국으로서 상설 중재 재판소에 일본을 제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헤이그 밀사 사건은 역풍을 불러와 일제는 고종의 퇴위를 강요했고, 고종은 7월 20일 순종에게 양위하고 말았다.
고씬?3년 가까이 머물렀던 중명전을 떠나 경운궁 함녕전으로 거처를 옮겼고, 중명전은 역사의 무대에서 잊혀져 갔다. 러시아공사관 등을 설계한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찐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중명전은 1901년, 1925년 두 번의 화재를 겪었다. 1925년 화재의 경우 피해가 심해 외벽 등 일부만 남았으나 새로 지었다.
고종이 세상을 떠난 1919년 이후 중명전은 일제가 덕수궁을 축소하는 과정에서 궁역에서 제외됐으며, 외국인 사교클럽에 임대돼 외교관과 선교사 등이 출입했다. 해방 후에도 서울클럽, 아메리칸클럽 등으로 이름이 바뀌어 사용되다 정부 수립 이후 구황실재산으로 등록됐다.
고종의 셋째 아들로 일본에 머물고 있던 영친왕이 1963년 귀국하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중명전을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거처로 내주었다. 그러나 영친왕의 아들 이구씨가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은행에 저당이 잡혔고 1977년 일반에 매각돼 사무용 건물과 주차장으로 쓰였다.
2003년 정동극장이 이를 사들였고, 이후 중명전의 내력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문화재청이 2006년 12월 매입, 다시 국가 소유가 됐다.
사적 124호로 지정돼 다시 덕수궁의 일부로 돌아온 중명전은 현재 복원공사가 거의 완료됐다. 문화재청은 이곳에 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사건을 알리는 전시관을 꾸미기로 하고 문화유산국민신탁에 관리운영을 위탁했다.
을사늑약의 비극을 알리는 중명전 전시관은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오는 29일,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남경욱기자 kwnam@hk.co.kr
■ 고종 "새 곳서 새 국가 만들겠다"
덕수궁, 즉 경운궁은 현재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위용에 가려져 있지만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제국(帝國)의 정궁(正宮)으로 기획된 궁궐이다.
경운궁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아관파천을 계기로 해서였다. 을미사변 직후부터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2월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곳에서 새 국가를 만들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리고 여러 준비작업을 거쳐 그 해 10월 12일 경운궁 앞 환구단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경운궁 건설 공사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을 때부터 시작돼 대한제국기 내내 계속됐다. 고종은 경운궁의 터를 넓히기 위해 서쪽의 중명전, 북쪽의 돈덕전과 선원전, 그리고 남?으로 많은 땅을 사들였다. 그러나 영국, 미국, 독일 공사관 등이 있어 한계가 있었다.
경운궁이 제국의 중심으로 등장하면서 서울의 중심이 광화문 앞에서 대한문 앞, 즉 지금의 서울광장으로 옮겨졌다. 고종은 경운궁 내에 중명전, 석조전 등 신식 건물을 많이 지어 위엄을 갖추려 했다. 1902년에는 정전인 중화전을 완공했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기 전까지 13년 간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중심이었다.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이후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선황제가 머무르는 궁궐로서 위상이 높았다.
그러나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떠난 후 일제는 덕수궁에서 대한제국의 흔적을 지워갔다. 확장됐던 궁궐을 잘라내 민간에 불하하고, 덕수궁을 중앙공원으로 만들어버렸다. 지금의 덕수궁 궁역은 대한제국 당시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남경욱기자
■ 기고 /"덕수궁과 대한문은 근대 한국의 상징… 가치 새롭게 부각"
덕수궁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고종 황제가 강제로 황위에서 물러난 후 경운궁이 선왕의 거처로 사용되며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19년 고종 황제가 돌아가신 후 덕수궁은 깊은 잠에 빠졌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면서 대한제국의 황족 관련 업무를 관장하던 이왕직이 석조전과 중화전 그리고 함녕전 일원을 제외한 궁역을 매각하고, 나머지를 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많은 전각을 철거하면서, 황궁의 위상은 사라지고 말았다.
덕수궁은 그렇게 잊혀졌다. 공간은 변함없이 우리 곁에 있었고, 산술적으로 이용빈도는 높아졌지만, 그것은 고종 황제의 근대국가 건설 의지가 담긴 덕수궁이 아니었다. 덕수궁에 담긴 역사적 의미는 소멸된 채 유흥 대상으로서의 덕수궁만 남았다. 덕수궁의 소멸에는 식민정책이 개입되어 있었다. 궁역이 잘려나가고, 전각이 철거된 덕수궁에는 일제에 의해 새로운 기억이 새겨졌다. 덕수궁은 무능한 왕의 거처라는 식민사관이 자리잡았던 것이다.
광무개혁을 통해 근대국가 건설이 주도됐고, 고종 황제의 서거가 3ㆍ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제국의 심장부에서는 역사가 지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망국의 한이 서린 곳 또는 역사적 의미가 소거된 채 도심공원으로 인식되었고, 우리는 그 역사를 배웠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덕수궁의 역사는 일제가 심어놓은 거짓 역사였다는 사실은 최근에 개봉된 영화 ‘인셉션’을 떠올리게 한다. 역사의식 부재가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가져올지 아무도 인식 못하는 사이에 우리 모두는 일제가 심어놓은 것이 사실인 양 믿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지난 10여년 사이에 한국 근대사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 고종 황제는 서양식 근대국가를 지향하며, 경운궁을 중건하여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삼았으며, 환구단을 통해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전을 통해서는 대한제국이 당당한 근대국가임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하였다. 나아가 가로를 정비하여 세계적 화두였던 도시의 위생문제를 해결하고, 태평로와 소공로를 새로 개설하여 서울의 도시구조를 경운궁 중심으로 재편하였다.
이로써 광화문과 육조거리가 조선의 상징이었다면, 경운궁과 대한문 앞은 근대한국의 상징이자 원 공간이었고, 2002년 월드컵 이후에는 우리 모두의 뜻을 모으는 장소가 되었다. 구본신참(舊本新參)을 근간으로 제국의 틀 안에 민국을 지향했던 고종 황제의 뜻과 일치한다고 하겠다.
오늘에 이르러 이 시기에 대한 큰 그림이 선명해지면서, 덕수궁과 대한문의 가치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고, 지난 100여년 동안 왜곡되었던 우리 근대사가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던 덕수궁과 함께 당당하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제 덕수궁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담아낼지는 온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안창모ㆍ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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