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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 추서 안홍근 선생의 손녀 안기숙씨/ "가난만 남긴 독립운동 이젠 원망 안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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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 추서 안홍근 선생의 손녀 안기숙씨/ "가난만 남긴 독립운동 이젠 원망 안할래요"

입력
2010.08.1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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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기는 한데 속이 너무 상해 펑펑 울었어."

할아버지가 훈장을 받는다는데 손녀 안기숙(73)씨는 원망의 눈물을 흘렸다. 평생 딱 한번 얼굴을 본 할아버지와 전쟁 중에 숨진 아버지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안씨는 그들의 부재로 인해 젊은 날 지긋지긋한 생활고와 싸워야 했다.

그의 조부(祖父)는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 안홍근(1883~1950) 선생으로 광복 65주년을 맞는 15일 애국훈장 애족장을 받는다. 손녀 안씨는 13일 오전 여느 때처럼 부산 서구 초장동의 성당을 찾았다. 이날만큼은 특별한 기도를 드렸다. "원망을 했지만 이젠 안 할래요.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좋은 데 가서 잘 지내요." 그리곤 기억을 더듬어갔다.

광복을 앞둔 1945년 어느 날 안씨 등 4남매와 어머니가 살던 중국 북안(北安)성 작은 마을에 아버지(안도생)가 꾀죄죄한, 하지만 눈빛은 살아있는 노인과 찾아왔다. 할아버지라고 했다. '독립운동가' 조부에 대한 안씨의 유일한 기억이다.

북간도 무관양성학교 창립 멤버이자, 이시영 전 부통령의 친구였던 할아버지가 늘 아버지를 끼고 만주와 러시아를 누비는 사이 가족은 배고팠다. 안씨는 "남의 밭에 심은 감자를 몰래 캐먹으러 갔다 왔더니 동생이 죽었어"라고 떠올렸다. 홀로 집에 남겨진 세 살배기 남동생이 살충제가 묻은 밥풀을 게걸스럽게 먹다 거품을 물고 숨졌다는 것이다.

그토록 바랐던 '대한독립' 후에도 할아버지는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돌아왔다. 20일 넘게 지붕도 없는 기차를 타고 돌아온 서울 을지로 6가, 아버지는 리어카를 끌며 국수를 팔았다. 독립운동 전 친척들을 위해 "쌀 한 가마니씩 가져가라"던 호기와 재산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안씨는 "든든한 아버지라도 있었으니…"라고 말끝을 흐렸다.

6ㆍ25전쟁은 그나마 남아있던 가족의 안정을 앗아갔다. 갓 태어난 막내 동생 때문에 피란을 미루다 아버지는 죽음을 맞았다. "통장이 대문을 두드려 열어줬더니 인민군이 들이닥쳐 독립운동가라고 아버지를 끌고 갔어. 문을 열어주는 게 아닌데."

뒤늦게 들은 사실이지만 할아버지 역시 비슷한 시기(50년 10월쯤)에 북한군에 의해 사망했다. 매제인 최익현(77년 유공자 추서) 선생과 황해도 옹진의 과수원을 운영하던 중 국군 5명을 숨겨줬다는 게 이유였다.

아버지를 잃은 가족은 친척이자 독립유공자인 안춘생(초대 육군사관학교장) 선생의 도움으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오빠와 남동생은 부산 송도의 고아원으로, 안씨는 외삼촌 집으로, 막내 남동생은 어딘가로 입양 보내졌다. 엄마는 종교에 귀의했다. "외삼촌도 독립운동을 했는데 후유증 탓인지 정신이 온전치 못했어. 그래서 도망쳤지. 얼마 후 외삼촌이 자기 손으로 가족을 다 죽이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거리로 나선 그 후 삶은 말할 것도 없다. 어찌어찌 결혼을 했지만 입에 풀칠하며 수십 년을 사느라 독립운동 집안이란 자부심을 가질 여유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찢어진 밀가루 종이포대를 재활용하는 일을 남편과 함께 해서 한 달에 17만원 정도 벌었나, 벌써 40년 전 얘기네. 그렇게 6남매를 길렀지. 그래도 지금은 먹고 살만은 해." 안씨가 엷게 웃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5년 전국의 독립유공자 후손 225명을 표본 조사한 결과, 자신의 경제ㆍ생활수준이 '하층에 속한다'는 응답자가 59.4%(133명)나 됐다. 안씨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안씨는 기도를 마무리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나도 곧 갈 테니, 그때 꼭 만나요. 하늘에선 가족을 버려두고 독립운동 할 일은 없을 테니." 간경화 뇌졸중 협심증 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 곳이 없다"는 그의 발걸음은 성당에 올 때보다 한결 가벼워 보였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안홍근 선생은 1918년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 조직에 참가하고 그 해 여름 독립단의 일원으로 러시아 적위군과 함께 연해주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정부 수립 이후 총 1만2,209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부산=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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