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첫마디는 언제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었다. 48년 동안 그는 '패션 디자이너'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한국인으로서 자기만의 디자인을 창조해 세상에 알렸다. 나이도, 어디서 얼마나 공부를 했느냐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때론 사람들이 조롱 대상으로 삼아도 개의치 않고 고집과 열정과 자부심으로 외길을 고집한 그는 우리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개인적 인연을 맺은 스타들만이 아니었다. 그가 만든 옷을 입어본 적이 없어도 대한민국 남녀노소가 그를 좋아했다. 패션디자인의 선구자로서 한국의 미를 세계에 알린 노력을 인정했고, 불우한 이웃을 돕는 자리라면 빠지지 않는 마음에 박수를 보내고, 독특한 말투를 흉내 내며 그를 다정한 이웃처럼 대했다.
디자인 자체가 사치였던 1962년, 남자 디자이너로는 처음 패션쇼를 열면서 이 땅에 디자인의 씨앗을 뿌린 그는 자신의 디자인 세계를 멀리, 남의 것에서 찾지 않았다. 한국, 나아가 동양의 전통미가 가진 지성과 우아함과 신비감을 패션 디자인으로 승화시켰다. 평생 흰 색을 고집하고, "나의 디자인은 한국의 건축, 미술, 음악의 자부심과 품격을 종합한 예술"이라고 말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때문에 그의 디자인은 대중과 거리가 먼, 그의 표현을 빌리면 '판타스틱'한 스타들의 의상으로 끝나 버리는 한계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디자인 산업화의 중요성을 잘 알았던 그는 몇 년 전부터 보란 듯이 그 한계를 뛰어넘어 안경, 넥타이, 속옷, 양말, 도자기, 냉장고, 자전거 등에 '생활 속의 디자인'을 펼쳐나갔다. 지난해 만났을 때에도"패션 디자이너라고 의상에만 집착하지 말고 새로운 영역에 패션(열정)을 가져야 한다"며'산업디자이너'으로서의 역할에 의욕을 보였다. 그는 문화예술 공연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그의 모습은 이제 더 볼 수 없지만, 그가 반세기에 걸쳐 이룩해 놓은 소중한 예술적 산업적 유산인'앙드레 김'이라는 이미지와 브랜드는 한국의 자랑과 경쟁력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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