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폭염에 초록도 성이 났다. 숲은 짙어질대로 짙어져 섬뜩함이 느껴질 만큼 검푸른 빛을 토해낸다. 이 더위가 지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곧 퇴색되고 말, 마지막 절정의 초록이다.
그 성난 초록도 부드럽게 녹여 흐르는 강이 있으니 바로 같은 물줄기인 조양강, 동강이다. 이리 휘고 저리 굽어 흐르는 물줄기는 초록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다가도 또 그 푸른 들을 넉넉히 감싸 안는다. 지난번 아리수길(7코스)이 강물 속으로 직접 뛰어드는 걸음이었다면 이번 8코스는 산마루에 올라 굽이굽이 흐르는 장강의 물줄기를 위에서 관조하는 걸음길이다.
동강, 조양강 줄기엔 산자락을 품에 안고 강물이 휘도는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 여럿 있다. 아리수길 6코스에서 소개됐던 한반도 지형은 건너편 상정바위산에서 제대로 볼 수 있고, 정선 영월 평창의 접경지에 있는 백운산에 올라도 반도 모양의 산자락과 물줄기의 조화를 완상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동강의 전망대가 바로 병방치다.
정선군청은 이곳에 전망대를 만들어 놓더니 이젠 허공으로 튀어나간 스카이워크를 조성, 아찔한 조망의 공간을 준비 중이다. 길이 11m 되는 U자형 철제 구조물이 까마득한 벼랑 밖으로 툭 불거져 나왔다. 바닥은 밑이 훤히 보이는 강화유리다. 유리 아래 천길 낭떠러지가 시야에 그대로 들어와 걸음을 옮기기 쉽지 않다. 겨우 발을 옮겨 스카이워크 맨 끝에 서면 스릴은 최고조에 이른다. 이 스카이워크는 주변 주차장 화장실 등 편의시설 공사 등이 마무리되는 9월 초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병방치 전망대 까지는 승용차로 오를 수 있다. 길이 좁아 버스는 올라갈 수가 없다. 정선읍 북실리에서 전망대까지는 약 1시간이면 걸어 오를 수 있고 경사도 그리 급하지 않아 천천히 걸어볼 만하다.
병방치 전망대에서 새로 생기는 스카이워크와 강줄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는 이번에 바로 옆 좁은 산길로 접어든다. 강변 마을인 귤암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이 오솔길은 예전 귤암리 등 강변 주민들이 정선읍으로 나들이 가기 위해선 꼭 넘어야 했던 길이다. 마을 어르신들은 이 고개를 병방치라고도 했고, 뱅뱅이재라고도 불렀다. 이리 구불 저리 구불 넘는 고갯길이라 붙은 이름이다.
첩첩 산자락으로 이뤄진 정선 땅은 교통이 개발되기 전 육지 속의 섬 같은 오지였다. 정선읍으로 연결되는 광하교 다리가 놓인 게 1950년대 후반이었다고 한다. 그 전에는 배로만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당시 교통부 장관이 시찰을 나왔다가 물이 거세 강을 못 건너고 하루를 정선에서 지체한 뒤, 서울로 돌아가선 바로 다리를 놓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지금 귤암리 앞 강물을 따라 난 강변 포장길도 70년대 중반에야 놓여졌다. 강변의 벼랑으로 처음 걷는 길이 만들어진 건 그보다 조금 일렀다. 주민들은 그 길을 ‘호박길’이라 기억했다. 서덕웅(64)씨는 그 이유를 “관에서 내준 시멘트를 들고 주민들이 걷는 길을 닦았다. 가파른 벼랑에 사람이 겨우 설 수 있는 길을 내는 것이라, 호박씨 심듯 정으로 바위를 쪼아가며 시멘트를 바르고 길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인근 광산소장에게 다이너마이트를 빌려 벼랑을 깎아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넓이의 길을 만들었다. 74년 정선읍장이 처음 지프를 타고 당당히 마을로 들어온 게 그 길을 밟은 첫번째 행차였다고 마을 어르신들은 기억한다.
이 길이 열리기 전 병방치를 넘어야만 했던 주민들의 삶은 가파른 고갯길만큼이나 팍팍했다. 정선장날이 열리는 날엔 새벽밥을 해먹고 콩이나 나물 등을 이고 지고 고갯길을 넘어간다. 읍내에 도착하면 오전 10시쯤. 물건이 다 팔리길 기다려 다시 고개를 넘어 집에 도착할 때면 아이들이 미리 저녁 준비를 하느라 집에선 하얀 연기가 피어 오른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해 어지러웠다가도 집을 보면 그렇게 반가웠다고 했다. 아이가 갑자기 아파 들쳐업고 고갯길을 뛰어넘던 기억을 떠올릴 때면 80, 90세 넘으신 어르신들의 눈가엔 금세 눈물로 그렁그렁해진다.
비료나 가재도구 등 큰 짐을 나를 땐 강물을 이용했다. 뗏목에 짐을 실어 광하교까지 강물을 거슬러 올랐다. 장정 서넛이 물에 뛰어들어 밧줄로 뗏목을 끌고 옮겨야 했다. 그나마 광하교부터는 국도를 이용해 차로 짐을 나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병방치 전망대에서 귤암리 마을로 가는 길. 뱅뱅이재로도 불리는 그 길은 중간에 36 굽이의 꼬부랑길을 지난다고 했다.
전망대 바로 옆 이정표가 가리키는 곳의 숲길로 접어들었다. 푸른 그늘이 시원했다. 나무들을 보니 단풍이 곱게 들 수종이었다. 가을이 기다려지는 길이다. 옛 어르신들이 잠시 쉬어갔을 커다란 그루터기에는 이끼가 두껍게 내려앉았다. 이 급경사에 이렇게 길을 냈을 선인들의 숨결을 호흡해본다. 물이 땅을 더듬어 제 길을 찾아가듯, 손바닥을 짚어가며 헤매 링榕爭?길이다. 인적 없는 고요한 길가에선 싸리꽃 나리꽃 등 여름꽃들이 인사를 한다.
얘기로 듣던 그 36 굽이 뱅뱅이길이 나왔다. 대관령옛길이나 구룡령옛길처럼 가파른 벼랑에 갈짓자로 길을 내 경사를 눕힌 길이다. 36 굽이를 꼭 세어보려 했는데 한 굽이, 두 굽이 세다 잠시 딴생각을 하는 바람에 숫자를 놓치고 말았다.
1시간의 숲길 트레킹이 끝나고 하늘이 열리며 귤암리 마을이 나타났다. 밭을 가득 메운 개망초가 눈부시다. 마치 메밀꽃밭에 선 느낌이다. 강변엔 수직의 절벽인 뼝대가 넘실대며 장관을 이룬다. 이른 봄이면 세계적인 희귀종인 동강할미꽃을 피워내는 뼝대들이다.
정선=글ㆍ사진
■ 여행수첩
아리수길 8코스는 강원 정선군 북실리에서 시작해 병방치 전망대를 거쳐 뱅뱅이재 산길을 따라 귤암리까지 이어진다. 걷는데 2시간에서 2시간30분 가량 걸린다. 북실리까지는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진부IC에서 나와 59번 국도를 타고 내려가는 게 빠르다. 승우여행사는 14, 15일 출발하는 아리수길 걷기(8코스) 참가자를 모집한다. 오전 7시 서울 광화문에서 출발해 당일로 다녀오는 일정이다. 참가비 4만5,000원. 교통비, 점심식사 등이 포함됐다. (02)720-8311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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