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옛 본관(현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 앞 로터리. 일제강점기 ‘센긴마에(朝銀前) 광장’으로 불리던 이곳은 식민지 조선 금융의 상징적 장소다. 한국은행 옛 본관이 당시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이었던 까닭에 그리 불렸다. 조선은행과 길 건너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경성우편국(현 서울중앙우체국 자리)은 조선에 없던 신식 건축물로서 당당한 외관을 자랑했다. 초가집, 기와집만 보던 조선의 눈은 거기서 근대의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모든 유혹은 위험하기도 한 것. 센긴마에 광장은 침략과 지배의 어두운 그늘이 뻗어나간 출발점이었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남대문로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이자 ‘경성의 월스트리트’였다. 남대문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을지로를 지나 광교까지 금융기관이 밀집했다. 일제 금융 침략의 세 정점이었던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해 일본은행, 십팔은행, 조선상업은행, 제국생명 등이 다 이 거리에 있었다.
조선 최초의 주식시장인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이 들어선 곳도 남대문로 안쪽의 명동이다. 대한제국 시절 조선 자본으로 설립된 대한천일은행, 동일은행, 한성은행도 남대문로 일대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이 은행들은 1920~30년대를 거치면서 일본 자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대한천일은행은 우리은행의 전신이다. 한성은행이 동일은행을 합병해 1943년 출범한 조흥은행은 현 신한은행의 뿌리다.
금융 착취의 첨병, 식산은행과 동척
일제의 금융 침략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강제병합 전에 이미 시작됐다. 1878년 개항장 부산에 상륙한 일본제일은행 부산지점이 효시다. 일본제일은행은 서울 등 전국에 지점을 두고 1902년부터 제일은행권 화폐를 발행, 중앙은행 역할을 하다가 강제병합 후 식민지 금융을 총지휘하는 조선은행이 된다.
일제는 금융기관을 세울 때 조선의 근대화와 문명 혜택을 강조했지만, 본질은 수탈이었다.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는 조선은행과 더불어 그 첨병이었다.
1918년 설립된 조선식산은행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금융 착취기관이었다. 총재는 ‘민간 조선총독’으로 불릴 정도였다. 조선식산은행은 일본에서 저리로 자본을 끌어와 조선 농촌에 고리로 대출해 배를 불렸다. 여기서 근무했던 한 조선인 행원은 해방 후 이렇게 말했다. “은행 건물의 벽돌 하나하나가 조선 농민의 고혈로 쌓은 것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도 다르지 않았다. 1908년 설립 당시 일제가 내세운 취지는 “식산 흥업의 길을 열고 부원을 개척해 민력의 함양을 기도해 한국민으로 하여금 문명의 혜택을 입게 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농민 수탈의 선봉이었다.
동척은 조선 전 국토의 40%에 해당하는 임야와 전답을 차지하고 고율의 소작료를 거둬 농민을 파탄시켰다. 동척의 토지 소유는 특히 전남 전북 황해 충남도의 곡창지대에 집중됐고,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이후 국유지를 불하받아 더 확대됐다. 부동산을 담보로 융자한 후 재산을 몰수하는 것도 동척의 주요 수법이었다. 동척이 공업 투자로 사업을 전환하는 1926년까지, 견디다 못해 만주로 간 농민이 29만 9,000명에 이른다.
나석주 의거와 ‘폭탄 기념일’
원성이 높더니 드디어 터졌다. 1926년 12월 28일, 연말이라 한창 바쁘게 돌아가던 조선식산은행 안으로 한 청년이 들어와 폭탄을 던졌다. 불발. 바로 길 건너 동척으로 가서 다시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또 불발. 그는 곧장 거리로 나가 일경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권총으로 자결했다. 이 과정에서 일경과 동척 직원 3명이 죽고 4명이 중상을 입었다. 비록 폭탄은 터지지 않았지만, 조선 민족의 응어리를 풀어준 쾌거였다.
동척이 있던 자리인 현재의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앞에 그 청년, 나석주(1892~1926)의사의 동상과 의거 표지석이 있다. 그는 1914년 북간도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의열단원이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 사람 모두가 쾌재를 부른 것은 아니다.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나석주 의사의 의거 직후 조선식산은행에서 일하던 한 조선인 행원이 남긴 기록이다. 폭사할 뻔한 위기를 겪고도 이런 말을 한 데는 스스로를 식민지 조선 최고의 엘리트로 여긴 선민의식이 깔려 있다. 조선식산은행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차별 없는 유일한 극락’으로 불리던 곳이다. 실제로는 승진과 퇴직금 등에서 일본인 직원과 차별이 있었지만, 어쨌든 가장 월급을 많이 받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머리 위로 나석주 의사의 폭탄이 떨어졌던 조선식산은행 창구의 세 직원, 토시마 료, 김병조, 이토 사다스미에게 이날은 ‘폭탄 기념일’이 되었다. 매년 12월 28일에 이들 ‘폭탄 3총사’는 동료들과 함께 축배를 들었다. 일제의 패망이 다가오자 조선식산은행의 조선인 행원 중 일부는 영어 공부에 열을 올림으로써 권력의 향배를 발빠르게 따라갔다. 또 일부는 해방 직후 일본인 중역들의 자금 빼돌리기를 묵인, 신생 독립국의 물적 토대를 흐트러뜨리는 데 일조했다.
명치정의 주식 투기 광풍
이제 명동(일제강점기 이름은 明治町ㆍ명치정)으로 가자. 지금의 롯데백화점 맞은편, 스타벅스 골목의 작은 사거리 왼쪽에 어지러운 간판으로 뒤덮인 아르누보센텀 빌딩이 있다. 음식점, 치과, 한의원, 은행, 증권사 등이 들어있는 이 건물 자리가 식민지 조선의 증권거래소인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이 있던 곳이다. 원래 건물은 돔을 얹은 석조였는데, 해방 후에도 대한증권거래소로 쓰이다가 2005년 철거됐다.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은 1920년 설립돼 건물이 완공된 1922년부터 거래를 시작했다. 설립 당시부터 주식 투기 광풍이 불었다. 3ㆍ1운동이 일어난 1919년과 1920년은 일제의 무단 통치가 극에 달한 때였지만, 일본 경제는 대호황이었고 덕분에 주가는 연일 폭등했다. 사기만 하면 떼돈을 번다는 소문에 다들 명치정으로 몰렸고 묻지마 투자가 대세였다. 쌀과 콩의 선물거래시장인 인천 미두취인소도 마찬가지였다.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은 1932년 인천 미두취인소를 합병, 조선취인소로 개편됐다.
1930년대 조선취인소의 투기 광풍도 대단했다. 거래의 90% 이상이 가진 돈의 10배까지 주식을 팔고 살 수 있고 등락 차액만큼 나중에 결제하는 단기취인 방식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일확천금의 한탕주의를 부추겼다. 위험도 그만큼 컸지만 전국에서 몰려드는 투기꾼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주식으로 망한 이들은 취인소 주변에 진을 친 채 주가 등락을 놓고 도박을 벌였다. ‘합백(合百)’으로 불리던 주가 도박꾼들로 주변 도로가 막혀 경찰이 단속을 해야 할 정도였다.
주식에 손 댄 조선인 대부분이 패가망신했지만, 드물게 큰 돈을 번 사람도 있었다. ‘조선의 주식왕’으로 불린 조준호가 대표적이다. 조선취인소에서 300만원(지금의 3,000억원에 해당) 이상을 벌었다는 인물이다. 그는 폭락장에 매집해서 폭등장에 파는 대담함, 오사카와 도쿄의 주식 시세까지 누구보다 빠르게 파악해 대응한 기민한 수완으로 억만장자가 됐다. 갑부의 아들로 일본에서 유학한 그는 1934년 조선취인소 거래원 허가를 받고 명동에 동아증권을 설립, 조선취인소 전체 매매의 10% 이상을 중개했고 직접 투자도 했다. 당시 언론은 그를 ‘실업계 투사’라고 칭송했다. 일본인과 일본 자본이 지배하던 당시 시장에서 조선인 주식왕이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2010년, 다시 남대문로에서
지금의 남대문로와 명동 일대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남대문시장과 명동의 상점과 노점에서 일본어로 쓴 안내문이나 일본어로 손님을 부르는 모습은 흔한 풍경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 일대를 거닐던 조선인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됐다. 잘 정비된 도로와 신식 건축물, 불야성을 이룬 상점들이 종로 등 북촌의 지저분하고 허름한 풍경과 대조를 이뤘기 때문이다.
해방된 지 65년, 더 이상 주눅들 일은 없다. 경성 월스트리트의 자취가 남은 이 거리에서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미래다. 그리고 그 전제는 과거를 잊지 않는 것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 청일전쟁후 日상인들 남대문로 진출…
1882년 청의 광동수사제독 우장칭(吳長慶)이 이끄는 청나라 군대 4,500명이 임오군란 진압 차 서울로 들어올 때 조달상들도 따라왔는데, 이들은 민간 상인들과도 거래를 트고 싶어했다. 청 정부도 서양 열강의 경제 침투 방식을 적용하여 조선을 속방으로 묶어두고자 했다. 이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라는 불평등조약이 체결되었고, 청국 상인은 도성 안과 양화진에서 상점을 열 권리를 얻었다.
그러자 일본인들은 조약 상의 '최혜국조관'을 위반한 것이라고 항의하고 나섰다. 조선 정부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특수 관계'를 이유로 들어 버텼지만, 결국 1885년 조영조약 체결을 계기로 모든 체약 국민이 서울 거주권을 확보했다.
외국 상인들이 서울에 다수 거주하자, 조선 정부는 이들이 흩어져 사는 것은 치안상으로나 풍기상으로나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조선 정부는 각국 대표들과 협의하여 서양인에게 정동 일대를, 중국인에게 구리개 일대를, 일본인에게 진고개 일대를 각각 전관(專管) 거류지로 지정해주었다. 해방 후 구리개(일제강점기에는 고카네쵸ㆍ黃金町)를 을지로로, 진고개(일제강점기에는 혼마치ㆍ本町)를 충무로로 이름지은 것은, 이들 지역에 새겨진 외세의 흔적을 누르기 위함이었다.
서울에서 상점을 연 청ㆍ일 양국 상인 중에는 돈놀이하는 사람이 많았다. 청상 동순태(同順泰)의 경우 조선 왕실의 돈주머니 노릇을 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는데, 대개 중국 상인들은 무역상과 전장(錢莊ㆍ근대 이전 중국의 전통 은행)을 겸했다. 반면 일본인들 중에는 은행에서 꾼 돈으로 질옥(質屋ㆍ전당포)을 여는 자들이 많았다. 1888년에는 서울의 일본 상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제일은행 인천지점이 한성출장소를 설치했다. 지금의 KB국민은행 본점 자리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 상인들은 호시절을 만났다. 그들은 협소한 진고개를 벗어나 남대문로변으로 진출했고, 1897년에는 현 한국은행 앞 광장 주변에 영사관, 거류민총대역장, 상업회의소를 지었다.
제일은행 경성지점은 1907년 현 한국은행 자리에 새 사옥을 짓기 시작했는데, 이 건물은 1912년 조선은행 사옥으로 준공되었다. 1915년에는 그 맞은편에 경성우편국이 웅자를 드러냈다. 일본영사관(현 신세계백화점 자리)과 조선은행, 경성우편국의 세 건물로 둘러싸인 이 장소는 식민지 금융의 중심지로 군림했다.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서울 공간 개조도 금융기관의 남대문로, 을지로 집중을 촉진했다. 서대문정거장을 대신해 남대문정거장이 중앙역으로 바뀌었고, 을지로 길에서는 1909년경부터 시구개수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확장ㆍ정비 공사가 진행되었다. 을지로와 남대문로의 접속지점에서 한국은행 앞 광장을 거쳐 서울역으로 이어지는 현대 서울의 월스트리트에는 이렇듯 외세의 경제 침탈 역사가 짙게 새겨져 있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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