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호기
투명한 햇빛으로 들끓는 텅 빈 정적 속에서
모가지를 꺾고 툭툭 떨어지는 붉은 꽃들은
결코 네 피가 아니다, 네 얼굴이 아니다.
한여름 잎들의 샤워꼭지에서 짙은 그림자를
쏟아 붓는 진초록 그늘이 한결 너답다.
머리카락 그림자를 깊게 빨아들인 너의 얼굴,
검푸른 수면에 무지개 빛 반짝이는
기름을 띄운 듯 너의 얼굴에 햇빛 조각들이
가볍게 떠돈다.
햇빛 조명이 정오의 적막함을 밝게 비추고
불붙은 뜨거운 공기 사이로
짙푸른 잡풀들이 몸을 비튼다. 온갖
날벌레들의 날개 소리만이 귓속에 가득해서
거기 너로부터 아득히 먼 곳으로 나는 허공을
날갯짓도 없이 날아왔다.
저기 저 아래 바다 위에 촘촘히 떠 있는
섬들은 내가 네 밑에 물결처럼 드러누웠을 때 본
너의 진초록 잎들 같다.
올려다 본 하늘 바다에 별이 된 너의 섬들,
섬으로 떠 있는 너의 잎들.
네게서 멀리 떠나왔을 때, 나도 모르게 나는
열매처럼 너의 이름을 입안에 넣어본다.
너의 맛을 모른다고는 할 수 없겠지. 하지만 이 여름
나는 결코 너의 이름을 입 밖으로 뱉어낼 수가 없겠구나.
안녕, 나의 진초록들이여.
● 입추 지나 처서까지는 눈과 귀와 코와 입을 바꾸는 시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늘의 빛이며 산색이 바뀌니, 또 여름 과일이 들어가고 가을 과일이 나오니, 매미들 사라진 자리에는 귀뚜라미들…. 인생은 왜 늘 변하는 걸까, 그런 상념에 젖어 코끝이 시큰거리다가도 뜨거운 볕을 받으면 또 눈살이 찌푸려지는, 미묘한 보름 남짓. 여름 나뭇잎들에게 작별하라고 있는 보름 같아서 해마다 입추 지나 처서까지는 늘 일이 손에 안 잡히고 마음이 서늘해집니다. 잘 담아두세요. 이 반짝이는 진초록 빛들. 그게 잘 헤어지는 방법이니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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