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ㆍ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1882년 청의 광동수사제독 우장칭(吳長慶)이 이끄는 청나라 군대 4,500명이 임오군란 진압 차 서울로 들어올 때 조달상들도 따라왔는데, 이들은 민간 상인들과도 거래를 트고 싶어했다. 청 정부도 서양 열강의 경제 침투 방식을 적용하여 조선을 속방으로 묶어두고자 했다. 이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라는 불평등조약이 체결되었고, 청국 상인은 도성 안과 양화진에서 상점을 열 권리를 얻었다.
그러자 일본인들은 조약 상의 ‘최혜국조관’을 위반한 것이라고 항의하고 나섰다. 조선 정부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특수 관계’를 이유로 들어 버텼지만, 결국 1885년 조영조약 체결을 계기로 모든 체약 국민이 서울 거주권을 확보했다.
외국 상인들이 서울에 다수 거주하자, 조선 정부는 이들이 흩어져 사는 것은 치안상으로나 풍기상으로나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조선 정부는 각국 대표들과 협의하여 서양인에게 정동 일대를, 중국인에게 구리개 일대를, 일본인에게 진고개 일대를 각각 전관(專管) 거류지로 지정해주었다. 해방 후 구리개(일제강점기에는 고카네쵸ㆍ黃金町)를 을지로로, 진고개(일제강점기에는 혼마치ㆍ本町)를 충무로로 이름지은 것은, 이들 지역에 새겨진 외세의 흔적을 누르기 위함이었다.
서울에서 상점을 연 청ㆍ일 양국 상인 중에는 돈놀이하는 사람이 많았다. 청상 동순태(同順泰)의 경우 조선 왕실의 돈주머니 노릇을 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는데, 대개 중국 상인들은 무역상과 전장(錢莊ㆍ근대 이전 중국의 전통 은행)을 겸했다. 반면 일본인들 중에는 은행에서 꾼 돈으로 질옥(質屋ㆍ전당포)을 여는 자들이 많았다. 1888년에는 서울의 일본 상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제일은행 인천지점이 한성출장소를 설치했다. 지금의 KB국민은행 본점 자리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 상인들은 호시절을 만났다. 그들은 협소한 진고개를 벗어나 남대문로변으로 진출했고, 1897년에는 현 한국은행 앞 광장 주변에 영사관, 거류민총대역장, 상업회의소를 지었다. 제일은행 경성지점은 1907년 현 한국은행 자리에 새 사옥을 짓기 시작했는데, 이 건물은 1912년 조선은행 사옥으로 준공되었다. 1915년에는 그 맞은편에 경성우편국이 웅자를 드러냈다. 일본영사관(현 신세계백화점 자리)과 조선은행, 경성우편국의 세 건물로 둘러싸인 이 장소는 식민지 금융의 중심지로 군림했다.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서울 공간 개조도 금융기관의 남대문로, 을지로 집중을 촉진했다. 서대문정거장을 대신해 남대문정거장이 중앙역으로 바뀌었고, 을지로 길에서는 1909년경부터 시구개수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확장ㆍ정비 공사가 진행되었다. 을지로와 남대문로의 접속지점에서 한국은행 앞 광장을 거쳐 서울역으로 이어지는 현대 서울의 월스트리트에는 이렇듯 외세의 경제 침탈 역사가 짙게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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