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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릴라 이윤택의 To be or Not to be] (27) 문제적 인간 연산, 그리고 유인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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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릴라 이윤택의 To be or Not to be] (27) 문제적 인간 연산, 그리고 유인촌

입력
2010.08.03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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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시민k’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저는 부산과 서울을 오가는 이중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서울에서 직업적인 연출가로 활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서울에서 시작한 첫 외부 작업은 1990년 4월 극단 현대극장에서 제작한 ‘청부’였는데, 독일 현대 극작가 하이너 뮐러의 작품이 한국에 첫 선을 보이는 무대였습니다. 이 작품은 그 해 동아연극상 작품상 연출상 남자연기상을 수상하면서 작품성을 인정받게 됩니다.

저는 잇달아 현대극장 김의경 선생으로부터 뮤지컬 연출을 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습니다. 저는 서슴지 않고 응했고, 1990년 12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뮤지컬 ‘수퍼스타’ 막을 올립니다. 표재순 김상렬 선생에 이어 세 번째 연출자로 선택된 저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무대를 선보입니다. 예수와 유다역을 신진 성악가들로 배치하고, 마리아는 오히려 윤복희 선생을 캐스팅에서 제외시키고 신인가수를 택합니다. 무대는 경사 진 쇠판을 깔아서 배우들이 미끄러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송진을 발랐더니 이제는 배우들이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때 배우 유인촌과 처음 만났습니다. 그는 아무리 스케줄이 바빠도 빌라도 역을 자청해서 출연하는 배우였습니다. 그러나 연습장에서 좀처럼 배우를 만나볼 수 없었습니다. 공연 일주일을 앞두고 처음 나타나서는 곧장 연습에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습을 시작했는데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코뿔소처럼 좌충우돌 움직이면서 노래하고 춤추는데 스무 명이 넘는 앙상블이 배우 유인촌 한 명을 따라 잡지 못했습니다. 제가 공들여 훈련시켜 놓은 앙상블 연기자들이 그냥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유인촌을 따라 잡아라 그대로 밀고 들어가 엉겨 붙어라!” 소리쳤지요. 정신을 차린 앙상블 배우들이 달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배우 유인촌과 스무 명의 앙상블 연기자들이 펼치는 장면이 격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배우 유인촌은 화가 나서 “이 녀석들아 가까이 좀 붙지 마라 연기에 방해가 된다 말이야” 소리쳤고, 저는 “같이 엉겨 붙어야 제대로 된 스펙터클이 나오니까 불편하더라도 같이 어울려 달라”고 주문을 해댔습니다.

그날 연습 시간 사이사이에 배우 유인촌은 제게 연극에 대한 자신의 꿈을 털어 놓았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선 무대가 명동예술극장의 대사 한 마디 밖에 없는 병사였다는 것, 그렇게 창을 들고 서서 한 마디 밖에 없는 대사를 수 없이 되뇌었다는 것, 그 대사 한 마디가 그렇게 무섭더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한국 연극의 현실에 대한 개탄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돈을 모아 제대로 된 정통연극을 할 수 있는 극단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꿈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같이 연극 한 번 해 보지 않을래?” 그러는 것입니다.

1990년 겨울, 제게 털어 놓았던 배우 유인촌의 꿈은 1995년 ‘문제적 인간 연산’으로 실현됩니다. 배우 유인촌이 직접 제작과 주연을 맡았고, 제가 극본과 연출, 신선희 선생이 무대미술, 젊은 작곡가 최우정이 음악을 맡았습니다. 연극 한 편 만드는 제작비가 3억 원이 들었으니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작 규모였습니다. 신선희 선생은 동숭아트센터 대극장 전체를 무너져 내리는 폐허의 궁으로 디자인했습니다. 실제로 연못을 만든다고 대형 물 탱크를 제작하여 5톤이나 되는 양의 물을 넣기도 했습니다. 파리에 체류 중인 이혜영씨를 애써 캐스팅했고, 제가 직접 북채를 잡고 무대에 등장하여 라이브 연주를 지휘했습니다.

‘문제적 인간 연산’은 극단 유의 창단 공연으로 성공적인 결과물이었고, 저는 연출가로서뿐만 아니라 극작가로서 인정받았습니다. 이듬해 대산문학상 수상식장에서 저를 시인으로 발굴해 주신 황동규 선생과 나란히 문학상을 받는 영광을 누린 것이지요. 스승은 시로, 제자는 희곡으로 본상을 받은 것입니다. ‘문제적 인간 연산’은 먼저 불어로 번역되었고, 이어서 독어와 영어로 번역되면서 프랑크푸르트 북페어 한국 대표희곡으로 출품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문제적 인간 연산’에 참여하여 한솥밥을 먹던 배우 스태프들은 지금 모두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무대 미술을 맡았던 신선희 선생은 노무현 참여정부 당시 정치적 정실 인사란 세인의 눈총을 받으면서 국립극장장 직을 수행했습니다. 신선희 선생의 동생 되시는 분이 당시 권력의 실세에 위치하고 있던 정치인이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신선희 선생은 정치적 성향과 전혀 별개의 예술적 역량을 지닌 세계적인 무대미술가입니다.

마찬가지로 유인촌이란 이름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보다 더욱 영예스러운 직책은 배우입니다. 그는 대극장 무대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분명하게 드러내면서 버티고 설 수 있는 몇 안 되는 한국의 정통 연극배우입니다.

한국 연극의 귀중한 인재들이 현실 정치에 연루되어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제한 받고 훼손 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 한국의 현실은 예술가들에게 과도한 정치적 부담을 지우는 거지요. 왜 그들을 예술가로 존재하게끔 그냥 두지 못하고 좌편향 우편향으로 갈라놓는 거지요. 연극인들은 생래적으로 모두 한 통속입니다. 그게 연극의 집단성이고 공동체정신이니까요.

그래서 요즈음 저에게 한 가지 소박한 희망사항이 생겼습니다.

1995년 그 시절 ‘문제적 인간 연산’에 참여했던 배우 스태프들이 다시 모여 당시의 무대를 복원하는 일입니다. 연산 유인촌, 녹수 이혜영, 무대미술 신선희, 음악 최우정, 극본 연출 이윤택의 ‘문제적 인간 연산’을 다시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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