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규정대로라면 납품 후 60일 내에 대금을 받아야죠. 지급시한을 넘기면 지연이자도 있죠. 그러나 갑-을 관계에서 그런 규정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당국의 조사에 대비해 일단 지연이자를 줬다가 다른 통장으로 재입금토록 하는 편법까지 쓰는데요.""기술 개발과 공정 개선을 요구하기에 없는 돈을 들여 원가 절감에 성공하자 기다렸다는 듯 납품단가를 깎더군요.""당국이 하도급 조사 낌새가 있으면 대기업 구매담당자들이 어김없이 전화해 답변 지침을 하달해 오죠. 구두발주 후 주문취소 등 하소연할 사정이 많지만 그 지침을 어기려면 사업 접어야죠."
■ 삼성전자는 지난 달부터 주요 협력업체를 대상으로 경영진단과 함께 납품관행을 조사하며 2ㆍ3차 협력업체 상당수를 1차 등급으로 올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현대ㆍ기아차도 얼마 전 공정거래위원장 입회 아래 2ㆍ3차 협력업체와 공정협약을 맺고 1차 업체와도 긴밀한 협력체제를 구축했다. LG는 'LG 정도경영 TF'를 중심으로 계열사 전체에 '오픈 이노베이션' 등 공정거래 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다. SK C&C는 'SK상생 인턴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청년실업과 중소기업 구인난 해소에 힘을 쏟고 있다. POSCO 역시 상생대상을 2~4차 협력사로 확대했다.
■ 앞의 얘기는 지식경제부가 최근 2,000여 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현장애로 실태조사에서 터져 나온 불만이다. 이를 토대로 정부는 납품단가 인하압박, 구두계약 후 취소, 현금 대신 어음지급, 기술 인력 빼가기를 즉각 시정해야 할 대기업의 4대 횡포로 꼽았다. 뒤의 얘기는 대기업들이 이 결과에 반발하며 경쟁적으로 소개한 상생처방이다. 글로벌 전쟁을 치르면서도 나름 정부의 상생방침에 맞추려고 노력했고 성과도 적지 않은데 '대기업=독식=탐욕'으로 매도 당하고 일부 장관은 아예 대기업의 이익을 죄악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항변도 포함돼 있다.
■ 정부도 너무 나갔다고 느꼈는지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듯이 일부 대기업의 그릇된 관행을 지적한 것"이라고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문제를 이렇게 끝낼 일이 아니다. 피차 칼을 뽑았으면 작은 결과라도 내놔야 한다. 기업호민관실(중소기업 옴부즈맨)이 제안한 '호민 인덱스'도입이 그것이다. 납품원가 책정, 발주 및 결제 시스템, 불합리한 관행 개선 등 핵심 쟁점에 대한 하도급업체의 평가를 지수화해 분기 혹은 반기마다 공개하는 것이다. 정부와 재계가 괜한 신경전을 펴기보다 이런 작업에 머리를 맞대는 것이 백 번 낫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