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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무의식이라는 전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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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무의식이라는 전쟁터

입력
2010.08.0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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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자유로워진다. 이렇게 말하면서 스피노자는 의 3부를 시작한다. 그가 분석하는 것은 정념이다. 자기를 사로잡는 정념의 정체를 인식하지 못할 때 인간은 그것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머리는 잘 알고 있어도 때로 마음은 모르거나 모른 척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 또 문제다. 머리와 마음 사이에 무의식이라는 오지가 있어 그렇다. 사실 이는 모든 진지한 예술가들의 공통 주제 중 하나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이 비슷한 주제에 혁신적으로 접근하고 있어 즐겁게 봤다.

영화의 소재는 꿈이다. 대개는 꿈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꿈에서 깨지만, 드물게는 꿈이라는 것을 자각한 뒤에도 한동안 꿈속에 머물 수 있고, 심지어는 원하는 방향으로 꿈을 진행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이 영화는 거기에서 기발한 물음과 함께 몇 걸음을 더 내딛는다. 꿈속에서 꿈을 꾸고 그 꿈속에서 또 꿈을 꾸는, 그런 꿈의 증식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될까?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의 꿈을 여러 사람이 공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타인의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은밀한 생각을 훔쳐보거나('익스트랙션') 특정한 생각을 심는('인셉션')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 영화가 그 대답이다.

특히 두 가지가 흥미롭다. 첫째, 꿈속의 꿈과 그 꿈속의 꿈이 각각의 이야기로 가동되면서 또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이 영화의 구조는 서사학의 관점에서도 꽤 신선한 설정이다. 영상과 드라마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매력은 저

다차원 서사 구조를 설득해내는 연출과 편집의 테크닉에서 나온다. 둘째, 이 영화는 100년간 존속해 온 정신분석학이 언젠가는 용도 폐기될 것이라는 선언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정신적 상처를 꿈속에서 직접 치료하는 사례가 나오고 타인의 꿈속으로 들어가 무의식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재구축하는 사례도 나온다. 어느 경우건 정신분석가는 이제 필요 없는 것이다.

놀라운 영화지만 의아한 대목도 있다. 인셉션은 타인의 무의식을 불법 점거하고 용도 변경한다는 점에서 범죄다. 이 영화는 두 번의 인셉션을 다룬다. 첫 번째 것은 비극적인 결과를 낳아 주인공을 고통에 빠트렸으니 채무변제가 됐다 치자. 그런데 감독은 두 번째 것을 하이스트(heist: 범죄자들의 한탕) 장르에서처럼 그저 흥겹게만 그릴 뿐 그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회피한다. 결과만 좋다면 수단은 상관없다? 만약 여기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누군가가 특정인의 무의식으로 들어가서, 자연에 시멘트를 바르는 것이 곧 발전이라는 뿌리 깊은 신념을 제거하고 생태주의적으로 올바른 생각을 심을 때, 그 '범죄'를 찬양할 수밖에 없다.

감독이 이 부분에 침묵한 것은 그것이 오늘날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어서 윤리적 판단이 새삼스럽다고 판단한 때문일 수도 있겠다. 따지고 보면 이 영화 속의 '작전'은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시스템을 비판하지 않고 그저 적응만 할 뿐인 탈정치적 주체를 길러내기 위해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일이 아닌가. 그에 더해 대한민국에서 일부 언론들이 교묘하게 수구적 프레임을 주입하는 것은 일종의 인셉션이겠고, 정부기관이 비판적 시민의 무의식을 사찰하는 것은 일종의 익스트랙션이 되겠다. 영화 속의 무의식 공간에서는 침입자와 방어자가 격렬한 총격전을 벌인다. 영화일 뿐일까? 우리의 무의식은 이미 전쟁터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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