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작가들의 묵직한 전시로 여름 미술계가 든든하다. 척박한 환경에서 묵묵히 땀과 열정을 쏟으며 한국 미술의 오늘을 일궈온 주역들이다. 독창적 예술세계를 만들어내기까지 바쳤던 수십년 세월이 화폭에 오롯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3일부터 추상미술 작가 정창섭(83)씨의 60여년 화업을 조망하는 회고전을 연다. 서울대 미대 1회 졸업생으로 1953년 국전에서 특선하면서 데뷔한 그는 한국에서 교육받은 한국현대미술 1세대 화가다. 큐비즘의 영향이 보이는 1955년 작품 ‘공방’을 시작으로 그의 대표작 67점이 전시장에 나온다.
특히 한국의 고유한 정서가 살아 있는 ‘닥’과 ‘묵고(默考)’ 연작이 중심을 이룬다. 한지의 원료인 닥을 물에 담가 손으로 비비고 주물러 농도를 맞춘 뒤 캔버스 위에 올리고, 다시 그 닥반죽을 매만져 만들어낸 작품들이다. 멀리서 보면 아무런 형태가 없는 듯 비어 있는 화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섬세하고 미묘한 종이의 결이 살아난다.
1950년대 후반, 거친 마티에르의 앵포르멜 회화를 선보이던 그는 점차 한국적인 것에 관심을 두면서 다양한 실험을 하다 1970년대 중반 결정적 전환기를 맞는다. 바로 한지와의 만남이다. 그는 예전 인터뷰에서 “유채의 끈적끈적하고 기름진 것이 싫었는데 한지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 속에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고 밝혔다. 한지를 캔버스 위에 붙이고 물감을 스며들게 한 ‘귀(歸)’ 연작을 시작으로, 절제된 형태와 짙은 색을 사용해 깊은 울림을 주는 ‘묵고’에 이르기까지 30여년간 그는 줄곧 한지와 함께해왔다. 전시는 10월 17일까지, 관람료 성인 3,000원. 8월 14일에는 국악인 황병기씨가 전시실에서 가야금을 연주한다. (02)2188-6000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에비뉴엘 내 롯데갤러리는 5일부터 ‘폭풍의 화가’로 불리는 변시지(84)씨의 개인전 ‘검은 바다’를 연다. 제주의 바다와 폭풍을 소재로 한 작품 20여점을 모았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검은 파도, 누런 황토빛의 마당과 초가집, 폭풍 속에서 날아오르는 바다새 등 변씨 특유의 격정적이고 역동적인 정서를 한껏 품은 그림들이다.
제주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공부한 그는 일본과 서울에서 차례로 활동하다 1977년 고향으로 돌아와 지금껏 바람과 바다, 말 등 제주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내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서귀포에서 문을 연다. 31일까지. (02)726-4428
서울의 첫 구립미술관으로 문을 연 성북구립미술관의 개관 기념전 ‘현존(The Presence)’에는 국내 대표적 원로화가들이 대거 참여한다. 초현실적 느낌을 주는 권옥연(87)씨의 회색빛 그림과 서세옥(81)씨의 현대적 동양화, 박서보(79)씨의 ‘묘법’ 시리즈가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고, 그 사이로 최만린(75)씨의 조각이 자리를 잡았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다 지난 5월 타계한 전혁림(1916~2010) 화백을 제외한 출품 작가 20명의 평균 연령은 77.2세. 미술관 명예관장을 맡은 서세옥씨의 권유로 98세의 윤중식 작가부터 66세 원문자씨까지 쟁쟁한 작가들이 최근작을 내놨다. 김보라 학예실장은 “평생 한 길을 걸으며 한국미술의 역사를 만들어온 대가들의 작품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다양한 가치들을 짚어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9월 12일까지 이어지는 1부, 9월 28일부터 11월 7일까지 열리는 2부로 나눠 진행된다. 성인 1,000원. (02)6925-5011
김지원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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