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가요에 이란 노래가 있다. 객지에서 고향의 강을 떠올려 가슴 속에 넘실거리는 향수의 강을 만들고, 세월이 물처럼 흘러도 돌아오지 않는 떠난 임에 대한 그리움을 함께 담았다. 고향 떠난 지 얼마 안 된 중학교 1학년 때 라디오를 따라 흥얼거리다가 입에 붙었다. 그리움이든 슬픔이든 울림이 깊은 감정에는 물기가 배어있고, 사람들은 저마다 그런 물줄기 하나쯤은 안고 산다는 것을 깨칠 나이는 아니었다. 그저 노래 가사처럼 ‘산을 끼고 꾸불꾸불’‘달빛 아래 출렁출렁’ 흐르던 고향의 냇물을 자주 떠올렸다.
■지금 보면 고향의 냇물은 초등학교 교가에 ‘동에는 금강수(錦江水) 맑게 흐른다’고 나오듯 ‘강’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란다. 삼십 리쯤 남쪽으로 흘러 다른 골짜기 물과 만나서야 겨우 낙동강의 지류인 영강(永江)을 이루니, 금천(錦川)이라는 공식 이름이 더 잘 어울린다. 그러나 봄가을은 고기잡이, 여름은 멱 감기, 겨울은 얼음지치기 등 아이들의 사철 놀이터이자 논에 물 대고 빨래하던 생활의 터전이니‘강’이라고 높여 부를 만했다. 그 ‘비단내’도 폭우가 내리면 돌변해 논밭을 훑었고, 아이들은 밤마다 집이 떠내려 가는 악몽에 시달렸다.
■중학교 물상 선생님은 베르누이 정리를 알기 쉽게 가르쳤다. 공기나 물 등 유체의 운동을 학생들이 줄을 맞추어 운동장을 도는 것에 비유했다. 이동 거리가 크면 빨리 가고, 짧으면 천천히 가고, 안쪽을 도는 학생 사이의 거리가 바깥쪽보다 짧은 것을 유체 내부 압력의 높낮이로 바꾸어 생각하라고 가르쳤다. 비행기를 띄우는 공기의 양력, 사행천(蛇行川)의 유역 침식 작용 등이 간단히 이해됐다. 물살이 급한 위쪽은 석축이나 돌망태로 막고, 물살이 느리고 수량이 많은 아래쪽은 두터운 둑으로 막은‘비단내’의 모습도 떠올랐다.
■고향마을은 늘 ‘비단내’와 함께 살았지만, 언제 터져 나올지 모르는 냇물의 마성(魔性)을 누르기 위한 손질을 멈춘 적이 없다. 그런 경험이 극단적 무위론으로 치닫고 있는‘4대강 망국론’을 의심스럽게 한다. 요순우탕(堯舜禹湯) 이래 치수(治水)가 국가의 기초적 존재 이유였던 동양적 전통에서 보아도, 인간의 삶과 문명이 물길과 공존하는 데는 인공의 손길이 불가피했다. 준설이나 보 자체의 선악을 다투는 무용한 논란보다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 접점을 넓히려는 과학적 논의가 필요하다. 찬반 양측이 강물처럼 맑고 여유로운 자세를 가지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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