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는 로버트 파커(Robert Parker)라는 유명한 와인 평론가가 있다. 비교적 객관적인 와인 평론으로 오랜 세월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의 신뢰를 얻어 온 그는 이제 와인 업계의 ‘신’과 같은 존재다. 파커씨가 인정한 와인은, 파커씨가 점수를 후하게 주는 와인은 당장에 판매율 상승으로 그 반응이 나타나기까지 한다.
나는 생각해 본다. 만약 이제 막 우리 나라 밖의 사람들이 한국의 음식과 더불어 알기 시작한 막걸리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되는 어느 미래에 와인 평론의 로버트 파커처럼 잣대를 제시하고 대중의 신임을 얻을 막걸리 전문가는 누구일까 하고 말이다. 그러다 보면 딱 한 명, 떠오르는 이가 있으니 , 등 우리 술에 대한 저술과 ‘막걸리 학교’를 운영하는 등의 노력을 주저하지 않는 한 사람, 바로 술 전문가 허시명 선생이다.
발로 그린 전통주 지도
1961년 생으로 전라도 광주가 고향인 허 선생은 기자직을 거쳐 여행작가로 나서게 된다. “맛은 공간과 함께 기억 되지요”라고 말하는 허 선생은 업으로 다닌 여행길에서 먹고 마시는 경험을 빼 놓을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고장마다 다른 자연 환경, 다른 식재료, 그렇게 만들어진 다른 맛은 오롯이 공간과 함께 떠오르는 기억이 되곤 했다. 특히 고을마다 마을마다 각기 다른 술을 체험하고, 그 술을 오래도록 만들어 온 장인들을 만나게 되면서 물에 따라, 지역의 재료에 따라 술 맛이 다르다는 것을 본격적으로 깨닫게 된 것이 1999년 즈음,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이었다.
술 만들기에 몰입되어 있는 장인들을 만나는 것에 점점 빠져들면서 여행의 흥을 돋우기 위한 술이 아닌, 술을 위한 여행이 시작된 셈이다.
밀양의 박문주, 경주의 교동 법주, 함양의 솔송주, 해남의 진양주…. 허 선생이 그리는 대한민국 지도는 그대로 우리 술 지도에 다름없다. 우리 술은 유독 ‘약이 되는 술’이 많은 편이며, 그 중 막걸리는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 가장 순한 전통 술에 속한다고 말하는 허 선생의 막걸리 자랑이 시작된다.
“우리 술, 특히 막걸리는 농기구 같은 존재입니다. 일상의 곁에 있어주는 벗과 같은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한 나라를 대표하는 술은 ‘군수품’의 성격을 갖지만, 주도가 낮고 따라서 유통기한이 비교적 짧은 막걸리는 몸에 이롭고 생활의 여유를 만드는 ‘착한 술’입니다.”
‘막걸리 학교’에서 빚는 막걸리
막걸리는 서민과 고락을 함께 한 ‘동기간’ 같은 술이라 표현하는 허 선생의 막걸리 사랑은 ‘막걸리 학교’로 이어졌고, 매 학기마다 40명의 정원을 채우는 일이 이틀에서 7분, 다시 5분으로 줄 만큼 그 인기는 입소문을 탔다. 막걸리 학교의 수업은 이론과 실기를 적절히 섞은 커리큘럼으로 진행되는데, 허 선생이 전국에서 공수한 5~6 종의 막걸리를 시음하는 시간은 막걸리 수업의 핵심이다.
“많이 마셔보고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맛을 찾는 것이 목표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한정된 도가나 주류회사의 한정된 맛에 길들여져 왔다면, 앞으로는 무수히 많은 우리 막걸리를 맛보고 그 맛을 구분하며 자신만의 기호를 찾아가는 일이 중요할 것이니까요.”
이번 취재를 위해 그 유명한 ‘막걸리 학교’를 찾은 날, 마침 이번 학기의 막바지 순서로 술 빚는 실습이 한창이었다. 백설기와 복분자, 누룩과 밑술을 하나로 섞는 일은 손과 마음이 한다. 정성을 다해, 딴 생각 않고 술 빚는 일에만 몰두하는 시간이 모두에게 평화롭게 느껴진다. 학생들의 비율은 남녀가 고르고, 노소가 고르니 스무 살 학생부터 정년을 맞은 어르신까지 한데 모여 각자의 술을 빚는 모습이 흥겹다. 막걸리 하나로 이렇게, 사람들은 하나가 된다.
“지역적으로 차별화된 재료를 쓰고 감미료를 넣지 않는 등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양조자들은 재료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소비자들은 술 빚는 과정부터 관심을 갖고 그 맛을 기다려주는 인내를 가질 때 막걸리의 인기는 ‘열풍’으로 그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업료의 열 배, 스무 배에 달하는 교통비와 체류비를 감당하면서 막걸리 학교의 과정을 이수한 재일동포, 미국 미시간에서 날아와 한 학기를 듣고 간 재미동포, 현재 서울에 체류 중인 외국인 등 다양한 학생들이 막걸리 공부를 위해 모여들면서 허 선생의 역할은 점점 중요해진다. 막걸리의 원리와 재료, 양조과정과 다양한 맛을 알게 된 학생들이 늘어날수록 ‘작은 양조장’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일이 무얼까 궁리하게 된다.
“나의 뿌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막걸리의 맛이라는 것이 있지요. 다양한 맛의 막걸리를 살리려면 애호가들이 작은 규모의 양조장을 지켜줘야 합니다.”
오솔길을 걷듯 즐기는 순한 막걸리
밥이 되는 술 막걸리는 안주가 중요치 않다. 그저 가득 부을 ?있는 사발과 좋은 마음이 필요할 뿐이다. 허 선생은 주로 호두나 생두부처럼 맛이 순한 안주를 간간히 집어 먹는 정도의 술상을 즐긴다고. 그렇게 소박한 술상을 두고 혼자 막걸리를 마시다 보면 홀로 오솔길을 걷는 듯 편안한 느낌이 든단다. 술의 맛을 음미하며 그 안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이태백의 경지가 허 선생에게는 멀지 않아 보인다.
박재은 푸드칼럼니스트 eatgamsa@gmail.com
사진=임우석 imwoo52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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