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중국이 사자성어로 새해 외교정책 원칙을 압축했을 때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후진타오(胡錦濤) 이후 국가목표로만 잡혀있던 ‘유소작위(有所作爲ㆍ일이 있으면 할 일을 한다)’를 대외에 공개 천명한 건 처음이었다. 이제 힘이 생겼으니 거침없이 뜻대로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중국에 진출한 기업인들이 전전긍긍하는 얘기를 들은 것도 올 들어서다. “우리를 대하는 중국관리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더 이상 우호적이지 않다.”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중국의 비중이 미국 일본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니다.
도처에서 겪는 외교적 굴욕
경제가 막연한 불안감이라면 외교 쪽은 당장 겪는 현실이다. 천안함 사건 이후 중국관리나 매체들은 “중국의 이해와 협력 없이 한국은 한 발도 내디딜 수 없다” “이런 식이면 한국에게 안 좋다”는 따위의 험한 언사를 아무렇지 않게 해댔다. 천안함 조사결과는 아예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이런 무시와 굴욕이 없다.
중국 뿐이랴. 러시아는 정작 우리는 빼놓은 채 미국과 중국에만 천안함 자체조사 결과를 통보했다. 턱없이 적은 인원과 짧은 기간의 시늉 끝에 대규모 다국적조사단의 결론을 뒤집는 내용을 내놓았다. 반갑게 조사단을 맞고 온갖 편의를 제공한 우리로선 그야말로 뭣 주고 뺨 맞은 꼴이 됐다. 항의에도 러시아는 미동도 않는다.
천안함 외교와 관련,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이나 ARF(아세안안보포럼) 의장성명에 대해 송민순 전 외교부장관은 절묘하게 핵심을 짚었다. “쉽게 얘기하면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제발 너희끼리 이런 데서 싸우지 말고 좀 평화적으로 알아서 문제를 풀어 나가라’, 이런 말입니다.”
유엔 성명에서 그나마 유의미한 단어가 공격(attack)과 함께 ‘규탄(condemn)“이었는데 ARF에선 그마저도 빠졌다. 한국 군함이 공격받았다면 북한 외에 달리 공격 주체를 상정할 수 없는 뻔한 사실마저 공인 받지 못한 외교를 성공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얻은 건 미국과의 강력한 동맹 확인과 대북 압박뿐이나, 이것도 미국 입장에서 더 절박한 북한의 비핵화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이쯤에서 동북아 외교지형에서 한국이 빠져드는 어려움을 대미 올인(All-in) 외교 측면에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삐걱거렸던 한미 관계 복원은 필요했지만, “한미 관계가 이렇게 좋은 때가 없었다”고 할 만큼 일방적으로만 치달아온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미국에 맞선 글로벌 파워로 성장한 중국이나 영광의 부활을 꿈꾸는 러시아에게 미국과 마냥 한 몸처럼 이해를 같이하는 한국이 마땅치 않게 보이는 건 당연하다.
자존심 상하는 얘기지만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자신들의 힘과 의지를 과시하고 미국의 의도를 꺾는 만만한 대체물 정도로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은 미국과 전례 없는 밀착으로 확실한 안전판을 얻는 대신 국제관계, 특히 한반도 주변국 관계에선 도리어 독립적인 가치와 기능을 훼손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예단이지만 리비아와의 외교 갈등도 그들 입장에선 한국 외교관의 정보활동을 미국을 위한 스파이 짓으로 인식했을 개연성이 크다. 대미 올인 외교의 과실만큼 도처에서 그 그늘이 짙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한 사례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신뢰와 균형의 외교 회복해야
흔히 일방적 친미주의자로 인식되는 이승만 대통령은 사실 미국과 자주 갈등을 빚으면서 한미 방위조약과 같은 실리를 챙긴 용의주도한 용미(用美)주의자였다. 미국은 물론, 국제관계 전체의 생리와 흐름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미 관계 발전만큼이나 중국 러시아 등의 신뢰를 얻고 독립적 가치를 증명해 보이는 노력이다. 쉽지 않겠지만 결국 인식과 균형의 문제다. 이명박 정부는 최근 친 서민ㆍ실용 정책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외교에서도 포괄적이고 실용적 측면에서 패러다임의 전환 내지 보완을 고민할 시기가 됐다.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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