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직물이 백제시대의 면직물로 밝혀져 화제가 됐다. 고려 말 문익점(1329~1398)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것보다 무려 800년이나 앞서, 교과서를 고쳐 쓸 수밖에 없게 됐다.
백제의 옛 땅인 전남 나주시 다시면 샛골에서도 언제부턴가 목화가 재배됐다. 목화가 널리 보급된 조선시대 샛골의 질 좋은 목화로 만든 무명베는 섬세하고 고와서 궁중에 올리는 진상품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만주, 일본, 대만에까지 수출될 만큼 명성이 자자했다. 나주의 샛골나이 무명은 곡성의 돌실나이 삼베, 한산 모시와 함께 옷감의 명품으로 꼽혔다. 샛골나이는 샛골 일대에서 무명 짜는 사람과 무명 짜는 일을 아울러 부르는 말이었다. 집집마다 큰 애기들은 물레를 돌려 목화 솜에서 실을 뽑아내고 날틀에 걸어 베를 짤 수 있어야 시집을 갈 수 있었다. 무명은 그 흰색으로 백의민족이란 말을 낳기도 했다.
대규모 방직산업이 발달한 해방 후까지도 무명을 짜서 직접 옷을 해 입는 집이 많았다. 그러나 1960년대 값싼 나이론이 보급되면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 사람이 손으로 만든 무명은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옷감에 가격이나 품질에서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시장의 위력은 그때도 지금만큼이나 대단했다. 마을 사람들은 쓸모 없어진 물레와 베틀을 산에 내다 버렸다. 딱 한 집에만 물레와 베틀이 남아있었다. 무형문화재 제28호 ‘샛골나이’ 기능보유자인 노진남(79) 할머니 댁이다.
노 할머니가 지난 주 서울로 올라왔다. 인간문화재 35명이 참가해 전통공예품 전시와 제작 시연을 한 ‘2001 여름 천공(天工)을 만나다’ 현장인 서울인사아트센터에서 며느리와 함께 시연을 했다. 노 할머니는 물레를 돌려 실을 뽑고, 며느리는 베틀에 앉아 베를 짰다.
‘이게 뭐 하는 거예요?’ ‘무명하고 광목, 마는 어떻게 달라요?’‘하루에 얼마나 짤 수 있어요?’‘값이 얼마에요?’ 관람객들의 질문에 노 할머니의 남편 최석보(82) 할아버지가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이 걸로 옷 한 벌 해 입으려면 인건비까지 합쳐 250만원 정도 들어. 팔리면 생계 유지가 되겠지만 그렇지가 못해. 벌이가 안 되는데 젊은 사람 누가 하겠어. 며느리가 그래도 하겠다고 하니 다행이야.” 가끔 부모님 수의를 만들기 위해 사러 오는 사람들 말고는 무명베를 찾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문익점에 의해 목화가 대중화되고 나서 600년 동안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몸을 따뜻하게 덥혀주고 보호해주었던 무명옷을 만드는 기술은 이렇게 실낱같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선조들이 애용했던 다른 공예기술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갓, 망건, 신발, 나전 등 전통공예품들은 모양은 아름답지만 안타깝게도 현대생활에는 잘 맞지 않는다.
쇠뿔을 얇게 갈아 투명하게 만든 화각(華角)으로 공예품을 만드는 화각공예는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전통 왕실공예지만 생느티나무 같은 재료를 구하는 것 조차도 쉽지 않아 한 해에 한 작품 만들기도 어렵다고 한다. 갓은 TV 역사드라마의 소품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전부 모조품을 쓰고 있고 진품은 팔리지 않는다.
전통공예는 지금 가사 상태다. 선조들이 오랫동안 애써 가꾼 전통공예의 맥이 끊기지 않도록 수요를 창출해 시장을 만들어 주는 정책적 배려가 아쉽다.
남경욱 문화부 차장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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