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40) 시인이 세 번째 시집 (실천문학사 발행)을 펴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손씨는 시집 (2003) (2006)를 통해 유년기에 체험한 농경문화에 빼어난 서정을 담아내며 ‘한국 서정시의 적자’로 손꼽혀 왔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시적 무대를 도회지에서의 삶으로 확연히 옮기면서 한결 풍부해진 상상력과 감수성을 선보인다.
손씨는 “첫 시집엔 증조외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번째 시집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이번 시집엔 아내가 나온다”고 말한다. 앞의 두 존재들이 시인에게 각각 고향과 탈향(脫鄕)을 상징한다면, 아내는 도시의 고단한 삶을 시인과 함께하는 동반자다. 시인은 한밤중 ‘아내가 겨우내 해장국을 끓이기 위해 베란다 창틀에 매어놓은’ 동태가 눈보라 속에서 아파트 외벽과 부딪는 소리를 듣는다. ‘어느 산중에라도 든 듯 따랑따랑 풍경소리를 낸다 몇 해만 더 머물고 뜨자던 서울 이 빚더미 아파트와 벗어날 수 없는 나날들이 한 채 소슬한 절집이라도 된다는 듯’(‘얼음물고기’에서) ‘모과’는 유산(流産)으로 아기를 잃은 시인 부부의 애달픈 사연을 담은 시다.
표제작인 6편의 연작 ‘나무의 수사학’에서 시인은 척박한 도시에 뿌리를 다시 내려야 하는 나무들의 고투에 도시인의 신산한 삶을 포갠다. ‘식육점 간판을 가리다/ 잘려 나간 가지 끝에 물방울이 맺혀 있다/ 흘러갈 곳을 잃어버린 수액이/ 전기 톱날 자국 끝에 맺혀 떨고 있는 한때/ 나무에게 남아 있는 고통이 있다면 이제는/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나무의 수사학 2’에서) 뿌리로 하수관을 뚫고 폐수를 빨아들여 연명하는 나무를 보며 시인은 ‘나뭇잎과 푸른 물고기에 대한 비유는 더는 쓸 수가 없다’고 토로한다(‘나무의 수사학 4’에서).
하지만 이 또한 엄연한 삶이 아니겠는가, 저물녘 퇴근길 버스 정류장에서 시인은 생각한다. ‘저를 얼마쯤은 놓칠 줄 안다는 것 묽디묽은 풍경 속에서 멈칫, 흐릿해질 줄 안다는 것 색을 흐린다는 것은 그러니 나를 아주 지우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나를 아주 지우지는 못하고 물끄러미, 다만 물끄러미 놓쳐본다는 것이다’(‘수채’에서) 얼마쯤은 자기를 지우고 팍팍한 일상에 스며들 줄 아는 열린 마음으로 시인은 삶을 긍정한다.
직장에서 일하던 시인의 시선이 창 너머 과일행상 부부를 향한다. 소아마비로 몸이 뒤틀린 남편과 만삭인 부인이 넝쿨식물인 수박을 가득 실은 손수레를 밀고 당기며 비탈을 오른다. ‘머리가 짓눌릴 때마다 볼펜을 똑딱거리며 바라보는 사무실 창밖 배배 튼 길이 꼭 볼펜 속 스프링 같다 꾸욱 짓눌리는 힘으로 따악 소리를 내며 튕겨오르는 스프링’(‘스프링’에서) 시인은 손가락 마디만한 볼펜 스프링으로 불구의 몸과 꼬부라진 길과 수박 덩굴을 꿰어 힘찬 생의 찬가를 부른다. 붕어와 망치, 곡괭이와 새 부리처럼 서먹해 뵈는 사물들을 절묘하게 연결하는 손씨 특유의 은유는 이번 시집에서도 빛을 발한다.
손씨의 시는 참신하되 어렵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부단한 문학적 자기 갱신의 성과일 텐데, 그는 아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형식을 띤 시 ‘얼음의 문장’에서 마모된 부리를 스스로 부수고 새 부리를 얻어 목숨을 잇는 네팔 설산의 독수리의 생태를 전하며 시인으로서 각오를 밝힌다. ‘아내야, 우리가 놓친 이름들을 헤며 아플 때 네 펄펄 끓는 몸으로 지피는 탄불이 오늘도 공을 치고 돌아온 내 곱은 손을 녹여줄 때 나는 생각했다, 네팔 어디 혹한에 벼린 부리처럼 하늘을 파고든 채 빛나는 설산을.’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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