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호이나키 지음ㆍ김병순 옮김
달팽이 발행ㆍ556쪽ㆍ1만8,000원
‘땅 끝’이라는 뜻을 지닌 스페인 북부의 작은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진 이곳은 오랫동안 유럽 가톨릭 신자들에게 순례의 대상이었다. 2006년 파울로 코엘류의 에세이 가 소개된 이후 국내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찾았고, 또 그 경험을 책으로 펴냈다.
미국의 부도덕성과 산업문명의 폐해를 비판해온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 리 호이나키(82)가 쓴 역시 산티아고 순례기다. 호이나키는 젊은 시절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가 맨해튼의 빈민구역에서 사목활동을 했고, 일리노이주 생거먼대학 교수로 강단에 서다가 스스로 시골로 내려가 농부가 된 사람이다. 수십권의 산티아고 관련 책이 나와있는 마당에 새삼스레 또 한 권이 목록에 더해졌다는 사실이 별스럽게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상적인 에세이나 여행정보 중심인 다른 책들과 달리 호이나키의 이 책은 독자들을 좀 더 깊이있는 종교적, 철학적 성찰로 이끈다.
호이나키는 65세 때인 1993년 프랑스 남부 생장피드포르에서 피레네산맥을 넘어 산티아고를 향해 길을 떠났다. ‘있는 것이라고는 한 수도자의 묘비뿐인, 한갓진 시골 외지의 무엇이 그토록 많은 순례자들을 끌어들였을까’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서였다. 아버지가 남긴 로사리오 묵주를 들고 기도문을 암송하며 32일간 800㎞의 길을 홀로 걷는 과정에서 그는 역사와 종교에 대한 성찰과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까지 두루 오가며 독자들을 순례길에 동참시킨다. 책에는 호이나키뿐 아니라, 12세기 프랑스 수도사 에메릭 비코, 17세기 이탈리아 성직자 도메니코 라피 등 호이나키가 벗 삼아 걸었던 과거의 순례자들의 이야기도 겹겹이 등장한다.
호이나키는 순례 첫날부터 무릎 통증에 시달리지만, 그는 자신의 고통이 피하거나 덜어야 할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주어진 은총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진흙탕 길을 통과하기 위해 깊은 물을 피해가기 위해 애쓰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각각 다른 독자적 의미를 지닌 행위임을 깨닫는다.
벨로라도의 작은 구둣방에서 만난 늙은 구두장인 앞에서 그는 개인과 공동체의 고유한 특성을 무참하게 파괴하는 현대 산업사회의 현실을 개탄하고, 스페인 방송국 PD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은 것을 계기로 “사람들이 직접 보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고 듣는 것을 점점 어려워지게 만드는” 텔레비전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오랜 고독과 침묵 끝에 산티아고에 도착한 호이나키는 순례를 통해 깨달은 것을 이렇게 정리한다. “나는 혼자가 아니며 어떤 자의식을 가진 개인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 존재의 의미는 부모님과 옛 순례자들이 물려준 살아있는 전통을 공동체 안에 확립하는 일에 얼마나 많이 기여하느냐에 달려있다.”
김지원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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