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엮음
글항아리 발행ㆍ392쪽ㆍ2만3,800원
말소리는 담장 밖을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낮출 것이며, 남편이 첩을 아무리 사랑해도 겉으로 내색하지 말고, 아는 것이 있어도 아는 척하지 말아라…. 금기어투성이의 이런 덕목들은 조선의 아버지들이 딸들에게 누누이 강조했던 것들이다. 조선의 딸들은 실제로 아버지의 가르침을 고분고분 따랐을까.
은 남성의 시선으로 기록됐던 조선 여성상의 꺼풀을 벗겨내고 남성들이 부과한 규범에 맞섰던 조선 여성들의 삶을 복원한다. 국문학, 역사학, 여성학을 전공한 13명의 연구자들이 지난해 하반기 시민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교양강좌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여염집 여성들, 남성들의 유흥에 동원됐던 기녀, 그림과 문장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사대부가의 여성들까지 다양한 부류의 조성 여성들의 삶을 ‘여성’의 시각으로 읽어냈다.
조선 여성들이라고 하면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조신한 모습이 쉽게 떠오른다. 정지영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는 외출과 노출에 대한 금압을 거부했던 여성들의 풍속도를 복원, 상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예컨대 거둥(임금의 나들이)은 왕조시대의 대표적인 볼거리였는데 조선 초부터 거리에 장막을 설치하거나 누각의 난간에서 구경하는 규방 여인들이 많아 세종 때는 사헌부에서 여성들의 구경을 금지하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국가권력의 통제도 무용지물이었다. 여성들은 구경을 삼가기는커녕 선조 때쯤에는 가마를 타고 짙게 화장을 하고 나와 거둥을 구경하는 풍속이 유행했을 정도라고 한다.
성종 때는 사족의 부녀들이 산간 계곡에서 연회를 베풀다 술에 취해 부축을 받고 돌아온 일도 있었다. 여성들의 절 출입은 법률로 금지됐지만 세종 때 양주 회암사에서 사찰 보수를 위한 불회가 열리자 사대부의 아내, 여염집 부녀자들이 시주라면서 옷을 벗어줘 물의를 빚기도 했다고 한다. 풍속의 힘은 임금도 이길 수 없었다. 이런 풍속을 금해달라는 신하들의 간청이 이어졌지만 임금들은 “법을 세운다 하더라도 따라 실행하지 않는데야 어찌할 것인가?” “부녀들이 사리를 모르고 그랬다”는 식으로 무기력한 답을 하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이혜순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남성 중심의 윤리규범에 반기를 든 조선 여성들의 흔적을 더듬었다. 예컨대 조선의 남성들은 여성들의 질투를 칠거지악의 하나로 간주하고 여성들에게만 책임을 물었다. 그런데 김호연재(1681~1722)는 투기는 부인의 부끄러운 행실이어서 신중하게 경계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아내의 투기는 남편의 행실과 동일선상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반박한 여성이다. 이 교수는 그를 부부의 화목을 위해 아내의 일방적 인내와 순종만이 아닌 부부 상호간의 진정한 이해와 존경을 요구한 여성으로 평가한다.
조선 최고의 육아서로 꼽히는 ‘태교신기’를 지은 이사주당(1737~1821)도 부부관계 재설정을 화두로 던진 여성이다. 그는 임신한 여성에게만 태교를 요구하는 것이 옳지 않다며 태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태아를 만드는 아버지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흔히 낭만적 사랑의 화신으로 회자되던 조선 기녀들의 삶을 성적 폭력의 희생자로 파악한 글, 국가경제를 부양하는 노동 주체로서 여성의 역할에 주목한 글도 조선 여성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면모를 보여준다. 200개가 넘는 시각물이 책의 짜임새를 더한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