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모 일간지가 주최하는 젊은 셰프들의 요리 경연자리에 참가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맛의 최전선에서 실무 중심으로 달리고 있는 젊은 셰프들이 호텔, 개인 레스토랑 구별 없이 실력을 뽐내는 자리였고, 경연은 매주 서너 팀이 참가하며 일 년 가까이 이어졌다. 일 년 중 내가 심사자의 자격으로 반 정도의 경연에 참가하면서 참으로 실력 좋은 셰프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특히 내 눈을 끈 한 팀의 주방이 있었으니 ‘오 키친’이라는 레스토랑의 주방 팀이었다.
요리에 대한 남다른 자세, 연구의 흔적이 보이는 참신한 시도 등이 흥미로웠고 결정적으로 그들의 요리는 맛이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셰프들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질 때마다 그들은 ‘선생님께서’, ‘선생님은’으로 거의 모든 대답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대체, 당신들의 선생님이 누구신가요?”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답했다. “스스무 선생님이요.”
오키나와-런던-뉴욕
일본 오키나와에서 태어난 스스무 요나구니 선생은 도심 외곽에서 허브며 채소 농사를 지은 지 3년이 지났다고 한다. “허브로 소스를 만들려면, 진짜 허브 맛이 나야 합니다. 허브를 다량 쓰지 않고 완성된 요리에 장식으로 하나 얹는다고 해서 허브 요리라 부를 수는 없지요.” 첫 대면이었지만, 이 한마디로 요리에 대한 선생의 가치관을 짐작할 수 있었다.
‘허브 요리’라 부르려면 ‘진짜 허브’를 ‘충분히’ 써라. ‘진짜 허브’는 허브 본연의 맛을 충분히 머금고 있는 것을 말한다. 재료가 신통치 않으면 농사라도 지어서 만들어내고, 그럴 수 없다면 어설픈 재료를 써가며 어설픈 맛을 만들지 말라….
나 자신이 요리를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선생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모두 내게 주시는 조언처럼 가슴으로 들린다.
1949년생 스스무 요나구니 선생은 20대가 되었을 때 망설임 없이 일본을 떠났다. 넓은 세상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한다. 그렇게 발길이 닿은 영국에서 모자란 여비를 메우기 위해 시작한 아르바이트가 ‘주방 설거지’였다고. 영어를 할 줄 모르고, 서양 음식에의 경험도 전무한 상황(당시는 70년대 초반이었다)에서 발을 들인 유럽의 주방은 곧 선생의 일상이 된다. 내가 실수하면 동양인들에 대한 선입견이 안 좋아질 수 있다는 생각이 당시에는 작업의 원동력이었다는데, 그렇게 주방에서 맡기는 어떤 일이라도 하나, 둘 완벽하게 마무리 해내다 보니 어느새 그는 요리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렇게 주방에서의 삶을 시작한 것이 벌써 30년을 넘겼다.
우연한 기회에 들른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그는 다시 인생의 전환을 맞는다. 도심 거리를 산책하면서 본 레스토랑마다 내걸린 메뉴들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다문화, 다민족이 모여 사는 뉴욕은 그가 이제껏 알지 못했던 맛으로 가득 찬 재미난 도시라는 것을 직감했다. 메뉴가 흥미로운 레스토랑에 일단 들어가 주문을 하고 맛을 본 후 셰프와 인사를 요청하고 자기소개를 하는 식으로 일자리를 잡았다. 뉴욕에서의 첫 주방은 ‘로렁(Laurent)’이라는 프랑스 레스토랑으로 그 곳에서 일 년 정도를 일했고, 이어진 그의 레스토랑 순례는 짧게는 하루 이틀, 길게는 반 년 정도의 배움으로 끝나고는 했다. 대학공부까지 한 그가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이해하지 못했던 그의 가족들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던 상황에서 스스무 선생은 이렇게 일하며 돈이 모이면 음식 맛을 보러 다니고, 도자기를 굽고, 돈이 떨어지면 다시 주방에 면접을 보고 하는 식으로 요리 내공을 늘려갔다. 2년 정도 일했던 레스토랑에서는 동양인 최초로 부주방장 자리까지 올라 뉴욕 외식업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의 아내이자 요리 연구가, 아티스트인 오정미씨를 뉴욕에서 만났다.
서울-학생들-오키친
아내의 전시회 때문에 잠깐 서울을 찾았던 것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그때 무언가 모를 힘이 스스무 선생을 잡았다. 아내를 설득하여 서울에서 요리를 해볼까 생각이 시작되었고, 연세대 어학당에 등록하여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내의 요리 연구소에서 스스무 선생은 종종 특강을 하고는 했는데, 그의 강의와 내공이 알려지면서 전문 셰프가 되고 싶은 학생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에게 배운 아이들이 막상 갈 곳이 없었어요. 나의 강의가 유명 요리학교 졸업장을 주는 것도 아니고 하니 취업으로 이어지기가 어렵더라고요.”
정말 제대로 배운 아이들, 그들의 열정을 이어갈 공간이 필요함을 느낀 선생은 본인이 직접 레스토랑 ‘오 키친’ (02-797-6420)을 만든다. ‘오 키친’ 주방에서 일하는 열두 명의 젊은 셰프들 중 두어 명을 내가 작년에 만난 것이었다. 레스토랑의 운영 방식은 국내에서 전무했던 콘셉트다. 메뉴의 구성과 맛은 물론, 요리사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재료 사입과 손익 계산까지 훈련을 받게 된다. ‘오 키친’의 주방에서 나가는 모든 음식은 스스무 선생의 검증을 받지만, 모든 것은 순전히 젊은 셰프들의 손에 달린 것이다.
“나는 우리 주방에서 코치나 디렉터의 역할이라 할 수 있어요. 식당 요리는 축구처럼 팀플레이기 때문에 팀워크가 생명이지요. 코치의 입장에서는 영리함을 갖춘 ‘멀티 플레이어’가 필요하다는 것도 축구와 닮은 점이네요.”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오 키친’ 셰프들을 위한 기숙사가 있다는 것이다. 셰프들 가운데 통근을 하는 이들과 기숙사에 머무는 이들이 있는데, 기숙사에는 30년간 선생이 모은 방대한 음식 자료와 서가가 갖춰져 있어서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자료를 조사하고 공부할 수 있다고. “이렇게 이삼십 대를 보내고 나면 우리 셰프들은 지금의 일상을 평생 추억으로 간직할 것입니다. 그 추억과 경험을 갖게 해 주는 것이 제 ‘선물’입니다.” 사람이 생을 마감할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추억’밖에 없다고 말하는 스스무 선생은 제자들에게 훗날 꺼내 볼 ‘추억’을 선물해 줄 수 있음에 기뻐한다. 사진 촬영을 위해 모인 젊은 주방 팀과 스스무 요나구니 선생의 조용한 웃음에서 이들이 한국 요리계를 깜짝 놀라게 할 힘을 비축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박재은 푸드칼럼니스트 eatgamsa@gmail.com
사진=임우석 imwoo52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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