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 컬트적인 시도가 눈에 띄지만 TV 드라마는 상식(혹은 일상의 진부함)의 구심력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재벌가의 암투든 첩보 액션이든, 흘러가다 보면 결국 ‘국물맛’이 비슷해진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 출생의 비밀 같은 양념을 듬뿍 치기 때문이다. 안방 극장이라는 드라마의 태생적 한계이고 동시에 “욕하면서 본다”는 존재양태를 가능케 하는 소구력이기도 하다. 지긋지긋하지만 무시무시한 인력이다. 올 여름 드라마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구심력의 정체는, 바로 가족이다.
“넌 줄 이미 아시면서 좋아하는 사람 있냐고 물으시더라… 있다고 그랬어”
TV가 다루고 있는 소재 가운데 상식의 궤를 벗어나려는 원심력이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이 아마 동성애일 것이다. 배우 홍석천씨가 커밍아웃했을 때만 해도 TV는 동성애자가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성역이었다. 그러나 ‘커피프린스 1호점’(2007) ‘개인의 취향’(2010) 등이 잇달아 만들어질 만큼, 이제 퀴어(queer)드라마적인 요소도 자연스레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침내 김수현 작가의 작품에도 동성애가 등장했다.
20%대의 탄탄한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는 SBS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화제의 중심은 경수(이상우)와 태섭(송창섭) 커플이다. 숱한 갈등의 폭발과 해소를 가족이라는 틀 속에서 변주해 온 김 작가의 전작들을 생각하면 적잖은 파격이다. 그러나 이를 가족주의 문법의 파괴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가부장적 가족질서, 정상과 일탈이라는 이분법을 정면으로 흔들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드라마 속에서, 가족주의는 한층 강고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경수와 태섭이 겪는 고통은 결국 가족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융해된다. 용서와 포용의 대상으로 동성애가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궁극의 공동체로서 가족이 묘사되고 있는 것인데, 어머니라는 구심력이 퀴어의 원심마저 흡수해버린 셈이다.
“저 산을 넘어야 고향으로 갈 수 있다. 난 만나고 싶다. 그래서 가는 거다.”
시청률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KBS ‘제빵왕 김탁구’는 잡초 같은 인물의 성공 스토리지만, 주인공 김탁구(윤시윤)의 에너지의 원천은 어머니를 향한 마음이다. 강남 개발을 놓고 벌이는 치열한 암투를 담은 SBS ‘자이언트’도 결국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의 조각을 맞춰놓고 나서야 흐름에 탄력이 붙는 느낌이다. 성모(박상민)가 강모(이범수)에게 “내가 네 형이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자이언트’의 한 장면은 너무도 익숙해 처음부터 재방송을 본 듯한 착각을 줬다.
납량특집과 전쟁 드라마도 가족의 구심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KBS ‘구미호: 여우누이뎐’은 호러와 가족애를 이종교배 해 만든 독특한 서스펜스 사극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중심축은 인간보다 더한 모정을 지닌 요괴와 인간의 부성이 부딪히는 안타까운 딜레마다.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기획된 블록버스터 MBC ‘로드넘버원’에서 이장우(소지섭)가 사신(死神)이 돼 적진을 뚫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서다.
식상하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들이 가족주의 코드를 반복하는 것은 시장성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대중문화평론가 정덕현씨는 “중장년층이 드라마의 주 시청층인 한 가족주의는 반복될 것”이라며 “케이블이나 IPTV 같은 새로운 윈도우가 활성화하고, 젊은 층이 드라마 시청층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 가족의 굴레를 벗어난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생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