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이혼, 엄마의 희귀병 투병, 방에 물이 새는 지독한 가난.
이예은(14ㆍ가명)양은 어느 것 하나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 인생의 짐들을 작은 어깨 위에 짊어져왔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2008년엔 왕따와 집단폭행 등 학교폭력이라는 웃짐까지 져야 했다.
1년간 누구 하나 돕지 못하는 사이 예은이 마음의 상처는 우울증, 대인기피증, 언어장애로 이어졌다.
반장에 우등상까지 꼬박꼬박 타왔던 소녀는 그 해 지적장애3급 판정을 받고 특수학교로 전학했다. 그런 소녀의 낯에 오랜만에 미소가 번졌다. 무려 5,000명의 얼굴 없는 후원자가 1,500만원의 장학금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숨은 수호천사들은 바로 대한민국 네티즌이다.
2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청소년폭력예방재단(청예단) 교육실. 청예단 관계자들은 지난 3개월간 온라인 모금 등을 통해 네티즌 5,000여명으로부터 기부받은 1,500만원을 예은이에게 전달하는 행사를 열었다. "위 학생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진취적으로 자기개발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5,000명 네티즌이 만든 작은 기적, 대현장학금을 수여합니다. 사회의 숨은 천사들의 마음을 대신합니다."
행사 내내 말없이 의자에 앉아있던 예은이는 장학증서를 받아 들고는 함께 온 엄마에게 다가갔다. 엄마 이경미(42)씨는 병원에서 입고 온 환자복차림 그대로, 꼭 쥔 손수건이 흠뻑 젖도록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엄마 왜 울어. 이제 나 물감도 사고 붓도 사고, 미술연습 실컷 할 수 있겠다. 많이 그릴래." 학교폭력의 정신적 후유증으로 길게 말하기 싫어했던 예은이의 입에서 또박또박 흘러나온 다짐이었다.
지독한 가난과 무서운 학교폭력
올 2월 예은이와 청예단은 아름다운 인연을 맺었다. 긴 외로움과 폭력의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동아줄이 내려온 것이다.
엄마 경미씨는 2002년 희귀병인 루푸스 진단을 받았다. 면역계가 이상을 일으켜 완치가 어려운 질병이다. 3년을 꼬박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고, 이후에도 후유증으로 1년 중 250일 이상은 병원신세를 졌다. 경미씨는 한때 배우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지만 발병 이후 병원비로 빚이 늘어갔고, 예은이와 동생 예정(13ㆍ가명)이는 6, 7세 때부터 쫓기듯 지하 단칸방으로 이사해 단둘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간혹 친척들이 둘을 돌봤지만 엄마의 사랑을 대신하기엔 역부족이었다.
2008년엔 5학년 같은 반 학생들의 지독한 따돌림과 폭행이 시작됐다. 예은이의 누추한 차림새와 우울한 표정을 표적 삼은 아이들의 폭행은 집요했다. 돌아가면서 책으로 머리를 때리고, 놀이터에서 발로 밟고, 연필로 얼굴을 긋는 일이 1년간 계속됐다. 각종 장애에 시달렸고, 결국 장애진단 판정까지 받아야 했다. 말을 잃은 예은이는 누구에게도 자신이 겪은 끔찍한 일을 털어놓지 않았다.
특수학교 전학 후에도 우울증 증세는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심해졌다. 급기야 올해 2월에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식탁 밑에 숨어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이를 발견한 엄마는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엄마는 청예단 소속 학교폭력SOS지원단에 전화(1588-9128)를 걸었고, 청예단은 위기상담 팀을 소녀의 집에 파견했다. 상담 팀은 경기 하남시 정신보건센터 최유미 상담원을 소개해 지속적인 상담을 받게 하고, 가난을 탈피할 방법도 모색했다. 그렇게 인터넷 모금이 시작됐다.
5,000명이 만든 작은 기적
3월 26일 청예단 관계자들은 예은이의 사연을 담은 동영상을 각종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올렸다. 모금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밤샘 작업으로 동영상도 만들었고 화가가 되고 싶다는 예은이의 꿈도 소개했다.
호응은 뜨거웠다. 다음(daum) 모금의 경우 이 사연이 500명 이상 네티즌의 청원을 받아야 모금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1주일 만에 2,030명의 네티즌이 추천했고 508명이 응원 댓글을 달았다. 응원 댓글 건당 100원씩 포털사이트가 후원금을 내놓았다. 모금은 석 달간 진행됐고 3,000여명의 네티즌이 후원금을 보냈다. 2,000여명의 청원, 3,000여명의 모금으로 예은이를 위한 장학금이 마련된 셈이다.
네티즌들은 100원부터 수만원까지 맘을 보탰다. "꿈을 잃지 마세요. 절대희망을 놓지 마세요" "지금 힘든 부분보다는 행복해질 더 먼 앞날을 보면서 힘차고 씩씩하게 이겨내기를 바란다"는 격려도 잊지 않았다.
인터넷에 익숙지 않은 시민들은 글만 인터넷으로 보고 직접 후원계좌로 입금하기도 했다. 한 중년 여성은 후원을 약속하며 눈물을 쏟았고, 한 중년 남성은 후원계좌로 500만원을 입금하면서 이름을 끝내 밝히지 않기도 했다.
이렇게 모인 돈이 모두 1,500만원. 예은이는 이 돈을 고등학교 학업을 마칠 때까지 6년간 조금씩 나눠 지급받게 된다. 예은이와 嗤떪?연신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방에는 여전히 물이 새고, 월세와 전기요금은 세 달째 밀렸다. 은행 빚도 2,000여만원이나 된다. 이 가난을 한번에 씻어낼 순 없지만 이들은 "희망을 봤다"고 정말 오랜만에 웃었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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