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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릴라 이윤택의 To be or Not to be] (25) 서울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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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릴라 이윤택의 To be or Not to be] (25) 서울 입성

입력
2010.07.20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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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0월 대학로 바탕골 소극장을 대관하여 ‘산씻김’을 보름동안 공연한 것이 최초의 서울 나들이 공연이 되었고, 이어 1989년 4월 ‘시민K’(이윤택 극본 연출, 제1회 동숭연극제 참가,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1990년 6월 ‘오구’(이윤택 극본 연출, 문예회관 소극장 공연), ‘산씻김’(실험극장 초청공연), 1993년 ‘바보각시’(이윤택 극본 연출, 산울림 소극장 초청공연)로 이어집니다.

부산 가마골소극장에서 연극 작업을 시작한 연희단거리패가 왜 연속적으로 서울 공연을 감행했는가? 물론 서울 연극인들의 관심 어린 애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울 첫 나들이 공연이 된 ‘산씻김’은 서울에 지면이 있는 연극인이 없기에 문학인들이 표를 팔아 주었습니다. 그 당시 직장에 다니던 소설가 신경숙, 문학평론가 이남호(고려대)교수, 시인 평론가 장석주 형 등이 표를 100장씩 가져 갔지요. 당시 실천문학사 편집을 맡고 있던 시인 김사인 형도 편집부원들을 모두 데리고 구경 와 주었습니다. 중앙일보 편집부기자로 재직 중이던 고 기형도시인은 계간 문예중앙 지면에 인터뷰 기사를 실어 주었습니다.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은 도서출판 열음사를 운영하던 시인 김수경씨입니다. 대학로에 열음사 출판사 사무실이 있어서 남자 단원들은 저녁 6시부터 출판사 사무실을 숙소로 정하고 밥 해 먹고 잠을 잤습니다. 경비를 아끼기 위해 여배우들만 여인숙에 재웠지요.

그러나 공연이 충격적이란 입 소문을 타면서 연극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오태석 선생은 공연을 본 후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에게 저녁 식사를 사 주었고, 제게 격려금 봉투를 건네주었습니다. 봉투를 열어 보니 만 원 권 석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린애 용돈 주는 것도 아니고 기가 차서 정진각형에게 “오선생이 아직 나를 학생 취급하는 것 같아” 했더니, “3만원이면 많이 준거야” 그러는 것입니다.

‘산씻김’에 대한 공식적인 반응을 보인 분은 극작 연출가 김광림선생이었습니다. 당시 동숭아트센터 예술감독을 맡고 있던 김광림선생은 즉각 제1회 동숭연극제 공식 참가를 의뢰했습니다. 서울 공연을 마치고 부산에 돌아와 보니 신현숙 선생의 공연평이 한국연극에 상세하게 발표되었습니다. 아주 긴 공연평이었고, 극찬에 가까운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역에 근거를 둔 극단의 서울 나들이는 내부적으로 엄청난 부담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제 서울 가서도 인정받았으니, 이 정도로 하고 부산 가마골소극장이나 잘 운영하자”는 것이 단원들 대다수의 의견이었습니다. 사실 서울 공연을 감행한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서울에서 지방에 내려오는 연극은 좋은 연극이고, 지역에서 막 올리는 연극은 무언가 모자란다는 편견을 극복해 보자는 것이 서울 공연의 의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김광림선생으로부터 제1회 동숭연극제 참가를 약속한 상태였습니다. 여기서 부산 가마골소극장은 자체 불화에 휩싸이고 맙니다. 애초부터 기획과 작품 제작을 분리했던 가마골소극장은 기획자측의 ‘서울 공연 더 이상 불가’ 결정과 약속한 공연은 해야 한다는 저의 의견이 부딪쳤고, 대다수 단원들은 기획자와 함께 극장을 떠나고 맙니다. 창단 멤버 중 남은 배우는 박은홍 한 명 뿐이었지요. 동숭연극제에 참가할 날짜는 다가오는데 배우는 없고 워크샵을 받고 있던 견습배우들 뿐이었습니다. 이 와중에서 저는 이듬해 봄 두 번째 서울공연 ‘시민K’를 준비합니다. 주연배우 시민K역을 신생극단에서 빌려오고, 여배우를 경성대 연극영화과 졸업예정자 중에서 최정일 교수에게 추천을 받았습니다. 또 한 명의 여배우는 부산대 3학년 학생이었던 워크샵 단원 윤선희였고, 다른 남자 배우 한 명은 대입 삼수생 금대용군이었습니다. 그 때 스탭이 부산대 독문학과 2학년 재학중이던 남미정양과 인쇄소를 그만두고 갓 입단한 오달수군이었습니다. 오달수군은 서울 공연 기간 내내 포스터를 부치고 밥 당번을 했습니다.

서울 두 번째 나들이 공연 ‘시민K’는 그 거침없는 속도감과 에너지, 충격적인 움직임과 미장센으로 장안의 화제작이 됩니다. 극단 목화의 ‘비닐하우스’(오태석 작 연출) 연우무대의 ‘늙은 도둑이야기’(이상우 작 연출) 극단 교실의 ‘꼽추왕국’(이병훈 연출) 극단 민중의 ‘아 체르노빌’(정진수 연출)등 서울의 기라성같은 극단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공연된 부산 가마골소극장 연극 ‘시민K’는 당시 일간스포츠에서 시행하던 이 달의 화제작에 선정됩니다. 구희서 이상일 한상철 양혜숙 4인의 평론가가 선정한 4월의 연극 ‘시민K’. 불과 5명의 어린 배우들을 이끌고 서울 입성한 지역연극이 대학로에 분명한 기치를 꽂는 날이었습니다.

“지난 해 민속적 연희양식을 무대에 끌어 들여 현재를 얘기한 ‘산씻김’의 서울공연으로 부산만이 아니라 서울무대에서도 지기를 얻어가고 있다. 지방과 서울무대의 격차라는 말이 자주 오르내리는 우리 무대 현실 속에서 당당한 어조, 왜소하지 않은 크기의 무대로 서울 관객과의 만남을 시작한 것이다.” (구희서의 ‘연극수첩’ 1989.4.15 일간스포츠)

‘시민K’에 대한 한국 연극계의 반응은 전폭적이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한국연극을 삼등분하고 계시던 세 분의 원로 연극인으로부터 모두 연출 제안을 받습니다. 극단 산울림의 임영웅선생은 산울림 소극장에서 공연을 하도록 제안해 주셨고, 그 제안은 1993년 ‘바보각시’(이윤택 극본 연출) 초연으로 이루어집니다. 당시 산울림 소극장 예술감독을 맡고 계시던 채윤일선생의 따뜻한 배려가 있었고, 산울림 소극장 무대감독 이성렬군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바보각시’ 공연을 지켜 주었습니다. 산울림 맞은편 낡은 이층 방을 월 30만원에 세 들어 살면서 공연을 했는데, 이른 아침 임영웅선생이 직접 찾아 오시기도 했습니다. 지역 연극인이 서울 연극인에게 진심어린 관심과 애정을 받았던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실험극장의 전설적인 배우 김동훈선생의 제안도 받습니다. 당시 실험극장 상임연출가였던 윤호진선생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청바지를 입은 파우스트’(이윤택 재구성극본 연출, 1995년 실험극장 제작)가 공연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학로 소극장을 운영하고 계시던 현대극장 김의경 선생의 제안이 현실적으로 빨랐습니다. 저는 ‘청부’(하니어 뮐러작 1990. 연출 현대극장 제작) ‘길 떠나는 가족’(1991.김의경작 이윤택 연출 현대극장 제작)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1991.현대극장 제작, 세종문화회관 공연) 세편을 연속적으로 연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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