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깔아뭉개 죽였는데…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15일 오전 1시 서울 강남구 교보생명사거리 한편에 작은 분향소가 마련됐다. 천막 안에는 장정 대여섯 명이 대리기사 이동국(52)씨의 영정을 안쓰럽게 보고 있었다. 대리기사 정모(40)씨가 침묵을 깨고 절규했다. "너무 억울해서 잠조차 잘 수가 없어요. 고인도 억울해서 구천을 떠돌 겁니다. 대리기사는 인권이 없는 건가요." 동료의 애통한 죽음 앞에 선 대리기사들은 한참 일할 시간인데도 쉬이 자리를 뜨지 못했다.
경찰과 대리기사 측 전언에 따르면 대리기사 이씨는 지난달 26일 오후 10시께 여느 때처럼 손님을 태우고 경기 남양주시에서 구리시로 향하던 중이었다. 고속도로로 들어서던 중 차가 약간 떨렸다. 술에 취해 보조석에서 자고 있던 차주 박모(41ㆍ설비기사)씨가 "왜 운전을 그 따위로 하냐"며 이씨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4, 5차례 때렸다.
이씨는 항의하자 차주 박씨는 "너 이XX, 안 되겠다"며 차를 세우라고 했다 다. 별내 나들목 근처에 차를 세운 이들은 차 뒤에서 실랑이를 벌였다. 함께 타고 있던 박씨의 후배 김모(23)씨가 말렸지만 소용 없었다. 그러다가 박씨가 갑자기 운전석으로 가더니 차를 급하게 후진시켰다. 차량 후미에서 약간 비켜서 있던 김씨는 뒷범퍼에 무릎을 받히고 넘어졌고, 이씨는 차 밑에 그대로 깔렸다. 차량은 10m 가량을 후진했다가 다시 전진해 그대로 달아났다. 이씨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경기 남양주경찰서는 사건 다음날 박씨를 체포해, 살인 및 뺑소니, 음주운전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그러나 영장은 법원에서 기각됐다. 박씨가 "술에 취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범행일체를 부인했기 때문이다.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은 "민감한 사안이라 자세한 내용은 말할 수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의정부지법 관계자는 "워낙 특이한 사안이라 (내용을) 확인해줄 수 없다"고만 말했다.
비통에 빠진 이씨의 노모(75)와 형(53) 여동생(45)은 변변한 항변조차 못했다. 이씨의 주검은 지난달 30일 처자도 지켜보지 않은 가운데 한줌의 재로 돌아갔다. 그는 쓸쓸한 '기러기 아빠'였다.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가구공장을 했지만 2005년 부도가 나자 부인(32)과 자매(11, 5)를 남겨두고 홀로 귀국해 대리기사로 살았다. 부인과 어린 자매는 비행기삯이 없어 남편과 아빠의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구리시의 10평짜리 옥탑방(월세 30만원)에 혼자 묵고 있던 이씨는 동료들보다 열심히 일한 덕에 한 달에 300만원 정도를 벌었다. 그 중 150만원을 중국의 가족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빚을 갚는 데 썼다. 이씨의 여동생은 "성공해서 재기하기 전엔 식구들에게 연락도 않겠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산 오빠"라며 "유품 중에 돈 씀씀이를 세밀하게 적은 가계부를 발견하고 하염없이 울었다"고 했다.
잊혀질 뻔한 이씨의 사연은 동료들이 세상에 알렸다. 그를 3년간 알고 지내던 대리기사 동료(아이디 '물레방아')가 대리기사들의 인터넷 카페인 '밤이슬을 맞으며'에 이씨의 안타까운 죽음과 억울한 사건처리 상황을 올린 것이다.
비슷한 처지의 대리기사들은 "남일 같지 않다. 우리도 늘 비슷한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분노했다. 뜻을 모은 대리기사 70여명은 이달 10일 추모협의회를 꾸렸다. 서울 강남 교보생명사거리, 경기 수원시 인계동, 부천시 상동 등 대리기사가 집결하는 7곳에 분향소를 만들고 추모 서명을 받고 있다. 추모협의회 대변인을 맡고 있는 정모(40)씨는 "17일까지 4,600여명의 서명을 모아 곧 법원과 국민권익위원회 등에 대리기사 인권개선을 촉구하는 청원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리기사들은 유가족을 위해 십시일반 모금운동도 벌였다. 현재까지 300만원이 모였다. 분향소를 찾은 대리기사들은 "이번 사고는 언젠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대리업체 난립으로 경쟁이 가열되고 차주의 횡포가 갈수록 커지고 있지만 대리기사를 보호할 법적 근거는 전무하다는 게 이들의 불만이다. "술에 취한 차주에게 맞아도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4대 보험 적용도 받지 못하는 등 대리기사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대리기사들은 행여나 불이익을 당할까 봐 다들 신분 노출을 꺼렸다. 그러나 이씨 사망사건을 계기로 대리기사의 인권문제를 부각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2차 서명운동(목표 1만명)과 릴레이 분향소도 계속 유지해 나갈 참이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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