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적 범죄는 시효가 없다는 상징적 교훈 일깨운데 의의"
지난 12일로 4년간의 활동을 마치고 법조인으로 복귀한 김창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위원장을 15일 오전 서초구 양재동 법무법인 사무실에서 만났다. 4평 남짓한 사무실에 들어서자, 한 켠에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아'라는 글귀의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해방 후 60여년 만에 이뤄진 친일파 재산환수 활동을 말해주고 있는 듯 했다. 그간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어봤다.
-4년간의 활동을 마치고 나니 소회가 어떻습니까.
"흔히 하는 말로 시원섭섭합니다. 지침이라고 해야 2005년 제정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뿐이니 어디서 시작하고 어떻게 할지는 순전히 위원회 몫이었습니다. 백지에다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었다고나 할까요. 기한은 정해져 있는데 방대한 업무량에 비해 인원도 적었고, 예산도 충분치 않았습니다. 그래도 직원들과 위원들이 사명감을 갖고 잘해줘서 생각보단 잘 마무리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해방 직후 반드시 해야 했을 일인데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어요."
-친일재산 환수에 대한 당위성 차원의 말씀인가요, 아니면 실무적인 어려움이 있었다는 말인가요.
"당위성뿐만이 아니라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이 일을 시작하다 보니 여러 자료가 이미 소실돼 규명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가장 아쉬운 부분이에요. 국가와 민족에 대한 범죄행위는 아무리 오래 되어도 결국엔 심판 받고, 바로 잡혀야 합니다. 이게 정의의 실현입니다. 그래야 나라가 바른 길로 가지 않겠어요. 살인은 15년이 지나면 공소시효가 없어지지만 역사적 범죄는 시효가 없습니다. 지금도 나치들을 잡아 처벌하는 청산작업을 계속하지 않습니까. 친일청산 문제도 마찬가지에요.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역사가 갖는 무게를 가벼이 볼 게 아니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흔히 정치 지도자들이 국민의 뜻과 반대되는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역사의 심판 받겠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지도 새삼 깨달았어요. 역사의 수레바퀴를 보면 고장도 나고 덜컹거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바른 길로 가게 된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드는데 그런 뜻에서도 역사의 심판 운운하는 말들은 함부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친일재산을 추적하고 환수하면서 기억에 남는 인물이 있습니까.
"대표적 친일파인 이완용을 조사했더니 남아 있는 재산이 별로 없어요. 이완용은 일제시기 조선팔도 곳곳에 여의도의 2배나 되는 땅을 샀는데도 말이죠. 조사를 해보니 해방 직전에 그 땅을 일본인 4명에게 거의 다 팔았어요. 그 엄청난 돈으로 분명히 금도 샀을 테고, 골동품도 샀을 텐데 이건 추적할 방법이 없어요. 물론 국가귀속 대상에 동산도 포함되지만 수사권이 없으니 조사가 불가능하지요. 궁리 끝에 국보나 보물급 중에 국고귀속 대상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문화재청에 의뢰해 목록까지 뽑아서 봤는데 없어요. 어쨌든 (해방되는 줄 알고 땅을 다 팔았으니) 이완용이 재테크를 잘한 거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통역을 맡을 정도로 일본어를 잘했던 송병준은 나중에 일본에서 살려고 했는지 홋카이도(北海道)에만 500만평의 땅을 샀어요. 우리 직원들이 그 사실을 알고 일본에 출장까지 가서 조사를 해봤더니 이미 처분한 뒤였습니다. 그런데 송병준의 후손 중에 한 사람은 '할아버지의 땅을 찾으면 엄청나다. 지금 돈이 없으니 소송비용을 대주면 나중에 나눠주겠다'는 식으로 재일동포를 상대로 사기를 쳤다고 하더군요.
일제 때 최고부자였던 민영휘는 육영사업을 했는데 그게 다 이유가 있었어요. 민영휘에게 억울하게 재산을 빼앗긴 사람의 후손이 민영휘를 찾아가 법적으로 문제삼지 않을 테니 '이것을 하라'며 몇 가지 요구사항을 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육영사업이었답니다. 그런데 민영휘는 그 학교 두 곳을 지으면서 각각 자기이름과 둘째 첩의 이름을 교명에 넣었어요.
친일파들은 당대에 잘 살고, 후손들도 제대로 교육받아 후대에도 잘 살지만, 독립운동가는 당대에도 재산이 없고, 후손들도 교육을 못 받아 지금도 참 어렵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참 아이러니죠. 이런 걸 잡아주는 게 정의입니다. 그런 일에 내가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서 좋았고 복 받은 일이죠."
-친일파 중에 168명밖에 재산환수를 못했습니다.
"특별법에 해당되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리스트를 1차로 만들었더니 462명이었습니다. 이들의 호적부를 뒤져 가계도를 만들고, 가계도에 나오는 후손들의 부동산을 다 조회했지요. 1922년에 호적이 만들어졌는데 그 이전에 죽은 친일파는 재산을 추적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북한이 본적인 인사들도 확인할 방법이 없었죠. 재산이 나오지 않은 사람들도 더러 있었고요. 이런 것들을 다 제외하고 남은 친일파가 168명입니다. 적어도 할 수 있는 방법의 99%를 다 동원해서 조사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창씨개명한 인사 중에 아직도 이름을 고치지 않고 일본식 이름으로 등기해 놓은 땅 중에 국고환수 대상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역시 조사를 안 한 것은 아닌데 조선사람이 창씨개명을 한 것인지, 원래 일본인인지 밝히기 어려워요. 형평성 문제 때문에 친일파 후손 중에는 불공평하다는 사람도 있는데 뒤늦게 시작한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친일파의 범주에서 보자면 이번에 재산환수 조치된 친일파는 극소수에 불과한 데 나머지 인사들은 그냥 묻어두어야 합니까.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나오는 친일인사(4,000여명)와 친일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행위를 했다고 인정한 사람들에 비해 우리 위원회가 국고환수 대상으로 정한 친일파 숫자가 훨씬 적습니다. 단순히 과거행적만 들춰내는 게 아니라 파격적으로 그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는 것이었으므로 소급입법의 문제나 재산권 침해소지를 줄이기 위해서도 그 범위를 좁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 조치의 목적이 재산환수를 얼마나 하느냐 보다는 친일청산의 상징으로, 역사적 단죄의 교훈을 남기는 데 있는 것으로 이해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재산환수가 결정된 친일파 후손의 상당수가 이의제기를 했는데요.
"행정심판이나 행정소송 등으로 71건의 이의제기가 들어왔습니다. 일제 강점기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을 국가귀속 요건으로 삼았습니다. 대가성 여부는 입증하기도, 판단하기도 어려운 부분이라 걱정했는데 사법부가 대체로 우리 손을 들어줬습니다. 71건의 소송 중에 1심에서 패소한 경우는 한 건밖에 없고, 2심 패소도 한 건입니다. 2심 패소는 현재 대법원 계류 중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이긴 것 중에는 후손들이 항소를 포기해 완전히 끝난 사건도 있고, 앞으로도 소송이 제기되는 것도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만 판단은 사법부의 몫이죠. 하지만 위원회가 환수결정을 내릴 때 대가성에 대해 엄격하게 해석하고 판단했기 때문에 크게 바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번 일을 하시면서 다른 나라의 과거사 청산사례도 짚어봤을 텐데요.
"프랑스, 중국, 독일 같은 나라들은 신속하고도 엄격하게 했지요. 특히 오스트리아는 나치 전범의 처벌은 물론이고 향후 나치와 같은 행동강령으로 행동하는 사람도 처벌하겠다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미래까지 염두에 둔 것이죠. 이런 나라의 법들은 처벌에 시효가 없습니다. 우리는 1949년 반민특위가 만들어졌지만 친일파 때문에 1년 만에 폐지됐어요. 이런 식의 왜곡된 역사청산이 잘못된 가치관을 심어줬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클 때만해도 주위사람 중에 자기 선조가 중추원(조선총독부 어용 자문기관) 참의를 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과거사위원회 활동이 하나 둘씩 끝나고 있습니다. 현 정부에 바라는 게 있습니까.
"정부가 위원회 활동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지침을 내린 적도 없지만 제대로 된 지원도 없었습니다. 우리 위원회가 활동을 끝내면서 청와대에 이런 활동과 정신이 교과서에도 실리는 등 사회적으로 공론화돼야 한다는 건의서를 보냈습니다. 여기서 얻어진 결과물이 자료관 등에서 보존돼야 하고요."
-보수ㆍ진보세력의 극심한 대립에 대한 해법이 보이지 않는데 공직생활도 하셨고 인권운동도 하신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각자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얘기를 들을 줄 아는 자세를 가지면 사회통합이 될 걸로 생각합니다. 다만 기득권층이 이런 자세를 더욱 적극적으로 가져야 합니다. 자기 권리가 침해됐을 때 대응수단과 방법을 가진 사람과 없는 사람 중에 누구를 먼저 배려해야 하겠습니까. 사회통합은 이런 사회적 약자들을 끌어들여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국가정책에 반영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 김창국 프로필
▦1940년 전남 강진 출생
▦목포고, 서울대 법대, 사법시험13회
▦김근태씨 고문사건 공소유지 담당 변호사, 강기훈씨 유서대필사건 변호사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창립
▦서울변호사협회 회장,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2001년 초대 국가인권위원장
▦2006~2010년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위원장
▦희망제작소 이사장, 참여연대 고문
정진황기자 jhchung@hk.co.kr
이태무기자 abcdef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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