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목관(松穆館) 이언진(1740~66)은 조선 영조시대의 천재 시인이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역관(譯官)으로 비천한 신분인데다 27살로 일찍 죽었으나, 23살에 통신사(通信使) 조엄(趙曮)을 수행하여 일본에 가서 시로 이름을 떨쳤다. 일본 문인들은 그가 “준수한 얼굴을 가진 젊은이로, 빼어난 재주가 눈썹과 이마에 드러났다”고 평했고, 당대의 명사 연암 박지원이 ‘우상전(虞裳傳)’을 남겨, 그의 삶과 문학을 되살필 수 있다. (‘우상’은 그의 자(字)).
최근에 서울대 박희병(朴熙秉) 교수가 낸 (돌베개)은 이언진의 연작 시집을 본격적으로 다룬 평설(評說)로, 품격 높은 고전 읽기 교과서라 할 만하다.
관(冠)은 유자(儒者)요 얼굴은 승려
성씨는 상청(上淸)의 노자(老子)와 같네.
그러나 한 가지로 이름할 수 없고
삼교(三敎)의 대제자(大弟子)라 해야 하겠지.
(儒其冠僧其相, 其姓卽上淸李, 要不可一端名, 三敎中大弟子.)(박희병 역, #120)
이 시의 제1구는 스스로 유교와 불교를 함께 믿음을 뜻하고, 제2구는 도교의 노자와 같은 성씨로, 스스로 ‘삼교의 대제자’를 공언한 것이리라. 이런 삼교회통(三敎會通)의 사상은 일찍이 장유(張維) 같은 선배에게서 찾아볼 수 있고, 동시대에도 홍대용(洪大容)은 공관병수(公觀倂受)라 하여 여러 사상을 공정하게 보고 함께 받아들일 것을 주장한 바 있었다.
이언진의 삼교 존신은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자유스런 사상과 나라 안의 이런 진보적 사상과 관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스스로의 자각이 두드러졌음은 3,4귀에서 “한 가지로 이름할 수 없고” “삼교 중 대제자”를 자칭한 데서 두드러졌다.
한편 이 자각이 이 시인의 “전방위적 저항”인 것을 박 교수는 ‘아만(我慢)’과 표리의 관계로 설명했다, ‘아만’은 스스로를 믿으며 스스로 높이는 교만을 뜻하는 불교용어이지만, 강렬한 자의식으로 풀 수 있다. 그것은 가령, “닭의 벼슬은 높다란 게 두건 같고/ 소의 턱밑 살은 커다란 게 주머니 같네/ 집에 늘 있는 거야 전연 신기하지 않지만/ 낙타 등 보면 다들 깜짝 놀라네(鷄戴勝高似幘, 牛垂胡大如袋 家常物百不奇 大驚怪橐駝背)라는 시(#98)에서도 높은 자부심이 드러났다.
일본을 다녀온 이언진은 26세 때인 1765년, 연암 박지원에게 몇 차례나 사람을 보내서 자기 글을 봐주도록 청을 넣었다. 박연암이 “자잘하여 보잘 것이 없다”라고 혹평했고, 이언진은 분노하고 낙담했으며,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버렸다. 박연암은 갑작스런 그의 죽음을 마음 아파하며 ‘우상전’을 짓고, 이언진의 이 시를 이끌며 “우상은 늘 비상(非常)하다고 여겼다”라고 했다. 그러나 “자신을 넘어설 계기” “조선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 대립자”가 이언진에게 도사리고 있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박지원의 중대한 과오였다는 평가이다. 연암 29살, 18세기 중반 한양의 문학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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