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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에이지] <18> 물리학자에서 악기 제작자로 변신한 A440 실장 정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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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에이지] <18> 물리학자에서 악기 제작자로 변신한 A440 실장 정구영

입력
2010.07.15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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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리학 이용 바이올린 소리 연구… 행복의 선율 찾았죠

"영주가 11살 때였죠. 줄리어드음악학교 선생님이 주신 소중한 바이올린이라며 제게 수리를 부탁했어요. 완전히 분해해서 아는 지식과 기술을 총동원해 고쳤죠. 영주는 그 바이올린으로 차이코프스키 콘체르토 연주 음반을 냈어요. 이후로도 영주 바이올린을 수리해준 게 10여 차례입니다."

미국 현악기전문점 A440 정구영(55) 실장이 말하는 영주는 바이올리니스트 사라장이다. 미국 유학 초기 음악가인 장씨의 부모를 알게 된 뒤로 지금까지 이어지는 인연이다.

장씨를 비롯해 수많은 유명 음악가의 악기가 정 실장의 손을 거쳐갔다. 그가 직접 만든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만 지금까지 70여대다. 현악기 제조ㆍ수리 전문가로 이름을 알리기 전, 정 실장은 만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물리학자였다. 그를 e메일과 전화 인터뷰로 만났다.

남들보다 일찍 시작한 제2의 인생

장씨 가족과의 인연은 정 실장이 인생 항로를 바꾸는데도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정 실장은 물리학을, 장씨의 부모는 음악을 공부하려고 197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로 유학을 갔다.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감대로 장씨 부모와 친하게 지내다 시카고에 바이올린제작학교(CSVM)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다.

"마치 번개 같았어요. '바로 이거다'라는 느낌이 말이죠. 바로 내가 찾던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 때문에 주저 없이 입학했어요."

30대 초였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에 좋은 나이면서도 한편으론 안정된 직업에 대한 갈망이 큰 시기다. 촉망 받던 물리학도였던 정 실장은 졸업만 하면 교수나 연구원 같은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 게다가 학창 시절 물리책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물리학도 좋아했다.

"중학교 때 물상을 배우면서 물리에 재능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어요. 고등학교 때 상대성이론에 흥미를 느꼈고, 더 깊이 배우고 싶어 대학도 물리학과에 진학했죠. 대학에선 몇몇 친구들과 그룹을 짜서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물리책을 골라 따로 문제도 풀고 토론도 하곤 했어요."

당연하게 여겼던 물리학자로서의 삶에 제동이 걸린 건 박사과정 유학 시절. 철 결정 표면에 다른 화합물이 결합하는 과정을 양자역학 원리를 이용해 분석하는 실험이 생각대로 진전되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졌다. 때마침 CSVM을 알게 됐고, 마음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돈이 되든 안 되든,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안정된 직업이 보장돼 있든 안돼 있든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 밥 먹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며 정말 좋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어느 쪽인가 생각했어요. 답은 물리학 박사보다 바이올린 제작가로서의 삶이었죠."

손재주+음악적 관심+물리학 지식

연주자라면 몰라도 악기 제작가는 생소하다. 정 실장이 이 직업에 일찍 눈을 뜨게 된 건 사실 물리학도로 살아온 덕분이다.

"중학교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클래식음악을 자주 들었고 교회 성가대에 나가면서 음악에 점점 더 관심이 많아졌어요. 성악을 한 아내의 권유로 유학 시절 틈틈이 클라리넷을 배우다 장학금을 쪼개 악기들을 사서 소리 나는 원리와 특성을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어려서부터 집안에 있는 물건들을 분해하고 고치는 데도 꽤 손재주가 있었다. 이 손재주와 악기에 대한 관심, 물리학 지식이 어우러진 직업이 바로 악기 제작가다.

제2의 인생을 일찍 시작했어도 갈 길은 험했다. 물리학 공부를 그만뒀으니 장학금도 없어져 아내와 함께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가며 1987년 어렵사리 CSVM을 졸업했다. 그때부턴 다행히 운이 따랐다. 악기 제작과 수리 분야에서 100년 넘게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회사 케네스 워렌 & 선에서 고급기술을 배우게 됐다.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 아마티, 과다니니, 갈리아노, 랜돌피 등 수십만∼수백만 달러를 호가하는 최고급 바이올린을 직접 수리하면서 경험을 쌓았죠. 많이 다치기도 했어요. 칼이나 끌을 아주 날카롭게 갈아 사용하는데, 처음엔 주의를 해도 자꾸 미끄러지거든요."

1988년 미국현악기제작가협회(VSA)가 주최한 국제악기제작경연대회에서 바이올린과 첼로 소리부문 최고상을 받았다. 실력을 인정받은 셈이다. 1998년 A440의 악기수리 총책임자로 직장을 옮겼다. A440은 음높이의 표준인 피아노 중간 라(A) 음과 그 진동수(440Hz)를 뜻한다.

과학적 신념으로 만드는 바이올린

"요즘엔 소리를 빨리 트이게 하려고 바이올린의 앞뒤 판을 얇게 만드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면 처음 몇 년간은 소리가 잘 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나빠지죠. 전 두껍게 만드는 편이에요. 10년, 20년이 지날수록 음색이 풍부하고 깊어집니다."

이런 신념과 고집 덕에 그를 따르는 후배들도 많다. 지난 25년 동안 가르친 10여 명의 실력파 후배들이 痔?한국과 미국 일본 등지에서 악기제작가로 활약하고 있다.

"영주 같은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콘서트에서 쓸 수 있는, 정말 좋은 소리 나는 악기를 더 많이 만들어야죠."

자신의 악기가 내는 소리로 수많은 청중을 감동시킬 때의 느낌, 계속 물리학자로 살았다면 맛보지 못했을 짜릿한 자부심이다.

■ 바이올린에 숨은 물리/ "위판·뒤판 두께가 소리 결정…연구할 여지 많아"

운지판이 없고 활로 연주하는 바이올린은 표현력이 대단히 풍부하고 음역도 4옥타브로 매우 넓다. 나무의 재질이나 두께에 따라 오묘하게 변하는 소리는 아무리 좋은 녹음기술로도 제대로 재현해내지 못한다. 실제 악기와 녹음된 음색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정구영 A440 실장은 바이올린 음반은 자주 듣지 않는 편이다.

"과학자들조차 잘 이해하지 못하는 악기가 바로 바이올린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아직도 연구할 여지가 많다는 얘기죠. 바로 이게 바이올린의 가장 큰 매력이에요."

과학자 출신답게 정 실장은 바이올린을 제작하고 수리할 때 생생한 물리학 지식을 동원한다. 예를 들어 바이올린에선 위판과 뒤판의 두께가 소리를 결정하는 중요 요소. 두께에 따라 각 판의 구조역학적 강도와 전파저항, 응력, 진동주기 같은 물리적 특성이 미묘하게 차이 나기 때문이다.

19세기로 넘어오면서 연주홀이 수백 명 이상 규모로 커지다 보니 연주가들이 점점 더 크고 강한 소리의 악기를 찾게 됐다. 소리를 키우기 위해 제작자들은 베이스 바(바이올린 위판 아래에 붙어 있는 막대기 모양의 부품)를 점점 길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게 위판의 진동(울림)을 방해하면서 소리 질이 떨어지는 문제가 생겼다. 정 실장은 10여년 전부터 물리학 원리를 응용해 베이스 바를 3조각으로 나눠 붙여 만들고 있다. 힘이 분산되면서 음질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이 아이디어를 적용해 만든 바이올린을 지난해 영주(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가 직접 연주해보더니 자기 악기인 과르네리처럼 깊은 소리가 난다고 놀라워했습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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