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은 수도권 주민들에게 북한산, 관악산만큼이나 사랑 받는 산이다. 바위가 적은 육산에 산세도 급하지 않아 오르기 수월한 데다 강남과 분당, 과천 등지에 면해 있어 이들 지역의 중ㆍ장년층이 유독 많이 찾는다. 농담 섞어 분류하자면 등산객 구성상 '보수의 산'으로 부를 만한 곳이다.
그래서 주말 서로 어깨를 부딪고 말을 섞으며 오르다 보면 일반 보수층의 정서를 생생히 체감하게 되는 일이 많다. 지난 정권에선 온 산이 대통령과 정권을 욕하는 얘기로 넘쳐났다. 누군가 개탄을 시작하면 주변 일행까지 끼어들어 맞장구치고 흥분하는 식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포한을 푼 지난 대선 직후 등산로 풍경이야 어떠했으랴.
보수마저 등 돌린 민심
그런데 바뀐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마 촛불정국 때부터 표정들이 다시 굳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어쨌든 지금 청계산에선 더 이상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를 옹호하는 목소리를 듣기 어렵다. 아니, 오히려 전임 대통령에 퍼부어댔던 욕과 비아냥이 방향을 바꿔 고스란히 되살아나고 있다.
뜬금없이 산 얘기를 꺼낸 것은 보수계층의 정서마저 근본적으로 바뀌어 있는 현실을 말하기 위함이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그래도 여전히 야당을 앞선 한나라당 득표율이란 게 보수의 '마지못한 선택'에 불과한 것임을 청계산 분위기는 확실하게 보여준다.
학문적 차원의 논의를 떠나 한국 보수층 일반의 정서는 분명 '사회적 소음(騷音)'과 관련이 깊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사실 "조용히 잘 살게 해달라"는 것뿐이다. 보수층이 전 정권을 감내치 못한 이유는 정책명분은 차치하고, 당장 여기저기 바꾸고 뒤엎는 과정에서 허구한날 발생하는 시끄러운 소음이 도무지 불안하고 불편했던 것이다.
MB정부에 대한 보수의 등돌림 역시 소음관리 실패와 무관치 않다. 이 정권에서도 소란스럽지 않은 날은 거의 없었다. 미국산 쇠고기파동을 시작으로 세종시, 4대강, 용산참사, 교육갈등, 대북문제 등이 줄줄이 굉음을 냈다. 전 정권 때보다 더 심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좀 조용해지기를 기대한 입장에선 오히려 데시벨(dB)수치가 더 높게 들리는 소음이었다. 결국 그들이 보기에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던 셈이다.
지방선거 참패로 예고됐던 청와대ㆍ정부 인사가 이제야 이뤄지고 있다. 때맞춰 한나라당의 새 지도부도 선출됐다. 이 과정에서 MB정부가 소음을 잡는데 왜 그토록 무력했는지 이유가 적나라하게 노정됐다. 정상적인 시스템을 파괴하고 운용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파당과 비선(秘線)이 그것이었다. 이런 구조 안에선 어떤 인재를 모아놓아도 합리적 판단과 실행은 기대하기 어렵다.
많은 이들이 새 청와대 비서진과 여당 지도부에 직언과 충언을 조언한다. 그러나 핵심을 비껴간 주문이다. 바뀌어야 하는 건 MB 자신이다. 유능한 참모는 유능한 지휘관의 조건이지만, 참모를 유능하게 만드는 건 지휘관이다. "주변에서 제대로 모셨더라면…"은 예전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하던 부질없는 얘기다. 제대로 사람을 고르고, 적절한 역할을 주고, 직분에 어긋남이 없도록 통솔하는 것은 대통령의 기본적 책무다.
해법은 오직 MB에게
일개 비서관이 청와대에서 난동을 부리고 상급자를 욕보였어도 내버려두면 그 순간부터 그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실세가 된다. 측근의 걸맞지 않은 처신을 지적해도 대통령이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리면 다시는 그런 보고를 할 수 없게 된다. 비선과 권부는 이렇게 간단하게 생겨난다. MB는 여권 내 권력투쟁을 경고하기 이전에 그들이 지키려 싸울 권력부터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MB정부는 이제 겨우 반환점에 섰다. 여러 평가 받을 만한 성과마저 대립과 갈등의 소음 속에 묻어버린 전반기의 실수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 어차피 진보 쪽은 MB에게 눈길도 준 적이 없다. 보수층의 마음마저 되돌리지 못하면 전 정권의 실패를 고스란히 뒤집어 반복하는 일이 된다. 해법은 오직 MB에게만 있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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