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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24> 전통불교 수호의 구심, 선학원(禪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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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24> 전통불교 수호의 구심, 선학원(禪學院)

입력
2010.07.12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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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색불교에 맞서 1921년 선학원 설립… '조선불교의 禪脈' 유지

서울 안국동 네거리에서 북촌 한옥마을을 향해 골목길을 올라가다 보면 윤보선 전 대통령 가옥 못 미쳐 왼쪽으로 3층짜리 사찰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기와지붕 아래 '중앙선원(中央禪院)'이란 편액이 걸려있는 이곳이 일제강점기 1921년에 설립, 왜색(倭色) 불교에 맞서 조선불교 수호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재단법인 선학원(禪學院)이다.

일본불교는 개항 직후인 1877년 부산에 진종(眞宗) 동본원사(東本願寺) 부산별원을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에 진출했다. 조선 침략을 노리던 일본 메이지 정부의 내무대신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외무대신 데라지마 무네요리(寺島宗則)가 동본원사 관장 겐뇨(嚴如)에게 직접 조선 포교를 종용해서 세워진 사찰이었다. 불교가 조선 사회의 심층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포교활동으로 일본에 적대적인 조선인의 감정을 위무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일본 승려들은 1895년 김홍집 내각에 건의해 수백년 간 금지됐던 조선 승려의 도성

출입을 해금시켜 환심을 사는 한편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종속시키려 했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무렵에는 일본의 6개 종단 11개 종파가 설치한 별원과 포교소가 전국에 68개소나 됐다. 친일로 기울어 이에 동조하는 승려들도 늘어났다.

강제병합 이듬해인 1911년 6월 조선총독부는 사찰령을 공포함으로써 직접 조선불교계를 장악했다. 조선의 사찰 가운데 30개의 큰 사찰을 본사로 지정해 본사 주지를 총독부가 임명하고, 사찰 재산 처분은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한 것이 골자다. 조선총독부는 또 승려들을 일본에 유학 보내 일본불교를 익히도록 했다.

선학원이 설립된 때는 일본불교가 들어온 지 40여 년, 사찰령이 시행된 지 10여 년이 지날 즈음이었다. 일본불교 의례가 혼용되고, 전통의례는 축소됐다. 무엇보다 일본에 유학한 승려들이 결혼하고 귀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일본불교의 특징인 대처식육(帶妻食肉ㆍ처를 거느리고 고기를 먹음) 풍습이 만연했다. 계율이 무너져 막행막식(莫行莫食ㆍ행동이 거침이 없고 아무거나 먹음)이 유행했다. 사찰령으로 권한이 커진 본사 주지들이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일제에 협력하고 일본불교에 동화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선학원은 이렇게 불교계가 왜색화(倭色化)하는 상황에서 설립됐다. 용성(龍城), 만공(滿空), 성월(惺月) 스님 등 민족적 성향이 강한 스님들이 주도했다. 용성 스님은 3ㆍ1운동 민족대표, 만공 스님은 구한말 선풍을 일으켜 근대 선(禪)불교의 중흥조로 불리는 경허 선사의 법을 이은 선승, 성월 스님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해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된 스님이었다.

"여러분 아다시피 지금 조선의 불교는 완전히 식민지 총독 관할 밑에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 조선의 중들은 일본 중처럼 변질이 되어가고 있단 말입니다 … 지금 우린 사찰령과는 관계가 없는 순전히 조선 사람끼리만 운영하는 선방을 따로 하나 만들어 보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오늘 회의에 부치게 된 거올시다."('만공어록'에서)

선학원 설립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1921년 5월 석왕사 간동 포교당에서 열린 회의에서 만공 스님이 한 이 말에서 선학원 설립의 동기를 알 수 있다. 선학원 이름에 '사(寺)'나 '암(庵)'이 아니라 '원(院)'을 쓴 것은 총독부 사찰령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의식의 발로였다. 그 이듬해에는 독신 비구승들의 수행을 뒷받침할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선우공제회가 선학원에서 설립됐으나, 재원 마련이 쉽지 않아 곧 활동이 중단되고 말았다.

침술의 대가였던 적음(寂音) 스님이 1931년 주지로 취임하면서 선학원은 중흥됐다. 전국의 선승(禪僧)들이 모여 전선수좌대회(全鮮首座大會)를 1931년, 34년, 35년, 39년에 개최했다. 이때부터 선학원은 지방 산사의 선객들이 서울에 오면 으레 머무는 사찰이 되었다. 선의 대중화를 위해 남녀선우회가 조직되고, 대중포교를 위한 기관지 '선원(禪苑)'도 발행했다.

마침내 전국의 선승들을 통솔하는 중앙선원이 설립됐다. 말 그대로 조선 선원을 대표하는 선원이었다. 전국의 45개 선원 300여명의 선승들이 중앙선원의 청규(淸規ㆍ수행지침)를 따랐다. 현재 중앙선원에는 1934년 동안거부터 1967년 하안거까지 안거에 참가한 선승들의 수행 기록 '방함록(芳啣錄)'이 남아있다.

선승들을 지도하는 조실은 일제 때는 만공 스님이 계속 맡았다가 해방 후 효봉(曉峰) 스님으로 바뀌었다. 성철(性澈) 스님의 스승인 동산(東山), 불교정화운동의 주역인 청담(靑潭) 스님 등 기라성 같은 선승들이 중앙선원에서 안거를 났다. 여성 불자들이 置璿求?중앙부인선원도 최초로 만들어졌다.

1935년 선학원에서 열린 제3차 수좌대회에서는 총독부의 후원을 받는 30본사의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 맞서 조선불교선종이라는 새로운 종단을 탄생시키고 종헌을 만들었다. 6,000여명의 대처승이 있는 교무원에 비해 소수인 300여명에 불과했지만 조선불교의 정통 수행승으로서 식민지 동화정책에 물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었다. 1941년 2월 열흘에 걸쳐 열린 유교법회(遺敎法會)에는 당시 조선의 고승이라고 불릴만한 스님들이 대부분 참가했다.

선학원은 안정적인 재정과 재산 보호를 위해 1934년 12월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으로 인가를 받았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국방헌금을 내고, 창씨개명 상담소를 운영하는 등 총독부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적극적인 행동은 하지 않은 듯하다.

"문제는 존립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선리참구원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이 선리참구원은 법령상 사찰도 아니요 포교상 아무런 존재 이유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정당한 불교를 포교하는 데 암(癌)으로서의 존재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총독부에서는 그 내용과 구성 인원 등 자세한 상황을 조사하는 중이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42년 8월 6일자 기사를 보면 선학원은 식민당국에 성가신 존재였다.

선학원은 일제 패망 때까지도 조선불교의 선풍(禪風)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계속했고, 이는 해방 후 불교 정화운동의 토대가 됐다. 이후 거대 불교종단들이 생겨나면서 상대적으로 쇠락해진 듯하지만 선학원은 올해로 90년째 수행자들의 공동체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973년 새로 지은 선학원 3층 법당에는 만공 스님이 직접 흙으로 빚은 불상이 그대로 모셔져 있고, 전국 550여개 분원 1,500여명의 스님들이 옛 조사(祖師)의 수행가풍을 계승해가고 있다. 중앙부인선원의 후신인 시민선실(市民禪室)에서는 재가신자들의 선수행도 계속되고 있다.

남경욱기자 kwnam@hk.co.kr

■ 만해 "승려 결혼" 주장 논란

대처(帶妻), 즉 승려의 결혼 문제는 일제강점기에 불교계를 가장 곤혹스럽게 만든 사안이었다. 조선불교 전통에서는 승려가 여자를 취해 파계(破戒)를 하면 산문출송(山門黜送)을 당해 승려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했다.

승려의 결혼 허용을 본격적으로 주장한 이는 뜻밖에도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스님이었다. 만해는 1910년 "대개 승니(僧尼)의 결혼을 금하는 것은 인구의 증식을 막는다. 승니가 혼인하여 순산을 하게 된다면 불교의 교세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유효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건의서를 조선총독부에 냈다. 만해는 1913년 펴낸 에서도 거듭 이 같은 주장을 했다. 당시는 세계적으로 '인구는 국력'이라는 사조가 고취되던 때여서 만해도 나라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인구의 증식이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만해의 주장에 정통 수행승들은 크게 반발했다. 만해와 가까웠고, 훗날 동국대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을 지낸 석전(石顚) 스님은 이 문제로 만해와 의절하기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산 범어사 주지로 있던 용성 스님 등은 대처식육을 금지해 달라는 건의서를 총독부에 냈다.

총독부도 처음에는 대처 문제에 신중했다. 일본불교계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26년 11월 대처를 허용키로 하고 대처승도 본사 주지가 될 수 있도록 각 본사의 사법(寺法) 개정을 허가했다. 조선불교의 독신수행 전통이 몰락하는 계기였다.

1937년 정초 총독부에서 열린 본사 주지 신년하례에서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이 사찰령을 만든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총독을 찬양하자, 마곡사 주지로 그 자리에 있던 만공 스님은 "데라우치 총독은 승려들에게 취처(娶妻)를 하게 했으니 지금은 지옥에 가 있을 것이다. 지옥에 가 있는 그를 천도하는 것이 데라우치를 위하는 것이다"라고 일갈했다. 뒷날 만해 스님은 만공 스님을 만났을 때 "나 같으면 할(喝ㆍ위엄있게 꾸짖음)만 하지 않고 방(棒ㆍ몽둥이로 후려침)까지 했겠소"라며 통쾌하게 웃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남경욱기자 kwnam@hk.co.kr

■ "일제강점기는 불교 근대화에 자극 줬지만 한국불교의 전통과 정체성은 후퇴했다"

일제강점기의 불교는 '식민지 불교'라고 지칭된다. 식민지 불교는 당시 불교계의 체질을 총체적으로 변화시켰는데, 그 유산은 지금도 불교의 각 분야에 남아 있다. 식민지 불교는 일본불교의 유입, 일제통치의 억압, 일제 및 일본불교에 대한 저항, 전통불교의 퇴진 및 수호를 의미하는데 각 방면의 영향은 다음과 같다.

일제강점기는 우선 불교 근대화에 자극을 주었다. 즉 근대적인 불교제도의 수용을 촉진케 하였다. 조선시대의 산중불교에서 탈피하여 대중불교로 나가려는 의식과 맞물려 종헌, 종법, 재단법인, 본ㆍ말사 제도 등 근대적인 종단으로 활동케 하는 조직과 행정의 경험을 제공했다.

그리고 불교 근대화를 위한 불교혁신론을 잉태케 했다. 개항기 이후 조선시대의 불교 배척이 사라지고 승려의 인권이 고양되면서 불교는 복권되었다. 이런 추세에서 일제강점기에는 불교가 사회와 대중 속으로 다가가기 위해 기존 불교의 관행ㆍ의식을 개혁하려는 혁신론이 왕성하게 일어났다.

이렇게 일본을 통한 불교 근대화는 근대 불교학의 수용과 포교 활성화를 가져왔다. 일본불교가 불교 발전의 모델로 인식되면서 승려의 일본 유학이 보편화되었다. 일본 유학은 근대 불교학의 수용과 토착화를 촉진케 했다. 그로 인해 전통적인 강원과 선원의 교육이 후퇴하고, 승려들이 도시로 가는 풍조가 팽배해졌다. 그리고 학교와 포교당이 세워지고 불교 잡지와 불교 책자가 발간되었다. 이는 불교 포교의 성과물인데, 일본불교의 영향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성장과 포교방법에서 자극받은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불교는 전통불교의 퇴진 및 반불교적 정서를 고착화시켰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불교계에 권력 지향의 속성이 노골화되어 공권력 의존, 주지권력의 집중, 선거문화 이식, 사찰재산 탕진, 명리 추구, 승려간의 갈등, 불교 공동체의 이완 등을 초래했다. 나아가서는 불교사회화 논리에 따라 불교의 세속화가 가속화되었다. 막행막식(莫行莫食)이 자행되고 승려결혼이 수용된 것은 대표적 예이다. 지금의 대처승과 은처승은 그 부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성찰케 하였음은 다행이었다. 일제는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한국불교를 관리하였기에 한국불교의 전통과 정체성은 후퇴하였다. 불교인들이 저항하였지만 일제의 강압으로 그것은 가시밭길이었다.

일본불교와 차별적인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니 종합불교, 호국불교, 민족불교, 정화불교는 여기에서 나왔다. 이처럼 일제 강점은 한국불교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제는 식민지불교의 잔재를 극복하고, 불교 본연의 길로 나가야 한다.

김광식ㆍ동국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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