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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키 큰 소나무 부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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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키 큰 소나무 부러지다

입력
2010.07.11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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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그렇듯

애초 숲은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시작된다.

일년생 풀이 들어오고, 뒤이어

여러해살이 풀들이 일년생 풀들을 뒤덮고, 어느덧

키 작은 나무가 들어와 여러해살이 풀들을 밀어내면

한동안은 작은 나무가 우거진

관목림의 천지.

사랑도 온갖 시련을 거치듯

그러나 관목의 시간도 오래가지는 못하고

키 작은 나무 다음에 눈, 비로 소나무가 자라면서

그 거친 세월을 보내다보면

세상은 이제 온통 소나무 숲으로 변한다.

아라동 제주대학교 안쪽의 소담한 소나무 숲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일 텐데

오후의 끝 무렵,

그대와 몰래 그 숲에 들어설 때마다 마주하던

곧고, 굵은 열주(列柱)들이여.

하늘로만 향하던 상상력이여.

그것을 두고 절정의 우리들 사랑 같다고

그대와 나는 손가락 걸며 여러 번 단언했지만

그러나 섬을 흔드는 태풍으로

그 숲의 소나무마다 생채기를 마구 드러냈을 때

문득, 내가 목격한 것은

아, 우리들 사랑의 숨은 정체였다.

● 제주도에서 보내던 겨울이 생각납니다. 서귀포시 예래동 어느 집 이층을 빌렸지요. 아래층에는 한라봉을 재배하던 30대 동갑내기 부부가 시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고, 마당에는 야자나무가 한 주 서 있었어요. 거기 그런 나무가 서 있는 게 어찌나 비현실적이었는지요. 그렇게 위로 솟구치는 나무는 한반도에서는 좀 보기 힘든 것이니까. 하지만 이윽고 밤이 되어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또 그렇게 마구 흔들리는 나무도 처음 봤습니다. 그 나무는 어떻게 뽑히지 않고 그 겨울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인지? 사랑의 숨은 정체라는 건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닐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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