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ㆍ1737~1805)은 18세기 실학자로서는 물론,의 명문으로 최고의 명성을 얻은 문장가이다. 일찍이 교우도(交友道)를 역설한 아홉 편의 단편(九傳)을 지은 것이 젊은 때의 일인데, 그런 연암이 가장 친애하는 사우(師友) 담헌 홍대용(湛軒 洪大容ㆍ1731~83)의 중국 교우록에 부친 서문의 끝에 이렇게 썼다.
"나는 그 책을 다 읽고 탄복하여 이렇게 중얼거렸다. 홍군은 벗 사귀는 법에 통달했구나! 나는 이제야 벗 사귀는 법을 알았다. 그가 누구를 벗으로 삼는지를 보고, 누가 그를 벗으로 삼는지를 보며, 또한 그가 누구를 벗으로 삼지 않는지를 보는 것, 이것이 나의 벗 사귀는 방법이다."(박희병 정길수 외 편역;,돌베개)
홍담헌은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실학에 정진한 참 선비로, 35살에 연행사의 서장관이 된 숙부(洪檍)를 따라 연행(燕行)하게 된 행운을 하늘이 자기를 세상에 내신 뜻이라고 기뻐한 사람이다. 게다가, 북경의 '인사동거리' 유리창(琉璃廠)에서 엄성(嚴誠) 등 세 사람의 항주(杭州) 선비를 만나 국경을 초월한 평생의 우정을 맺고 감격한 필치로 을 엮었다. 청나라 선비들과 두 달을 사귀며 주고받은 필담(筆談)이며, 시문과 편지들을 엮어 한 책이 되자, 담헌으로서는 당연히 가장 아끼는 후배 박연암에게 머리말을 청했고, 이렇게 이루어진 이 서문과 우정이 모두 아름다운 한 폭의 말로 된 시화(詩畵)를 이루었다.
연암 뿐 아니고 박연암의 제자로 박제가(朴齊家)는 이 회우록을 읽고 "밥 먹던 숟가락을 잊고 먹던 밥알이 튀어나오도록" 감동했다고 했고, 이덕무(李德懋)는 이 회우록을 연구하여 라는 글을 지었다. 이덕무는 이렇게 말했다.
"박중미(朴仲美) 선생이 영웅과 미인은 눈물이 많다고 했다. 나는 영웅도 미인도 아니지만, 한번 이 회우록을 읽으니 눈물이 줄줄 흐른다. 이 회우록을 읽고 마음을 상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과는 친구를 맺을 수 없다.()"
'박중미 선생'은 다름 아닌 연암 선생이다. 아마도 이덕무 스스로 이 글을 읽고 적잖게 울었다는 표현일 터이며, 연암 선생 앞에서 이렇게 극언(極言)하여 마지않았을 터이다. 연암이 에 쓴 다음 말은 동아시아 교우론의 결론이라 할 만하다.
"우도(友道)가 오륜(五倫)의 끝에 놓였다고 해서 낮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오행(五行) 중의 토(土)의 기능이 고루 사시(四時)의 바탕이 되는 것과 같다. 부자ㆍ군신ㆍ부부ㆍ장유 간의 도리에 붕우간의 신의가 없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람으로서 떳떳하거나 그렇지 못한 것을 우도(友道)가 다 바로잡아 주는 것이 아닌가? 우도가 끝에 놓인 까닭은 뒤에서 인륜을 통섭(統攝)케 하려는 것이다."
동국대 명예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