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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52> 대통령 선거 후 재야세력의 정당화 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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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52> 대통령 선거 후 재야세력의 정당화 구상

입력
2010.07.11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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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후의 실망과 좌절, 그리고 '비판적 지지'와 '후보 단일화'를 둘러싼 분열과 갈등에서 오는 후유증에 대해서는 앞에서 간략히 언급한 바 있다. 구속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분열과 갈등의 후유증에서는 다소 벗어나 있었으나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시국사범 석방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29 항복선언'을 받아내고도 아직도 구속되어 있으니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더욱이 6.29선언 후 양심수 석방이 지연되고, 그 가족들이 김대중에게 찾아가 '양심수 석방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는 '대통령선거만 치르면 (내가 대통령이 되어) 양심수 석방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해 울며 겨자 먹기로 김대중씨의 당선을 위해 애썼는데도 헛일이 되었으니 어디 가서 양심수 석방을 요구할 염치마저 없었다.

그러나 언론에 연일 시국사범 석방과 관련한 기사가 실리고 또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식 때 대대적인 사면 복권이 있을 거라는 소문이 떠돌아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 거기다 일반사면이 있을 거라는 소문까지 겹쳐 일반 재소자들도 사면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일반사면은 이루어지기도 어렵거니와 설사 이루어지더라도 혜택을 받는 재소자는 소수에 불과할 텐데도 일반사면이 이루어지면 자기도 석방될 것처럼 생각하는 재소자들이 대단히 많았다. 그래서 재소자들 가운데 '일반사면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많이 석방되는지, 그리고 자기도 석방될 수 있는지' 물어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답하기가 난처했다. 갇혀 있다 보면 약간만 석방을 시사하는 말이 나와도 그것을 믿게 되었고, 그러다 그 기대가 무산되면 무척 실망스러워 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반복되는 게 교도소의 한 풍경이었다.

나는 대통령 취임 때도 선별해서 석방할 것으로 보여 석방을 단념하면서도 언론보도뿐만 아니라 면회 온 사람들이 '곧 석방될 것'이라는 말을 많이 해서 혹 석방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그래서 대통령 취임식 때 석방될 것을 전제로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구상해 두기도 했다.

물론 나는 나의 석방과 상관없이 군사독재를 끝장내기 위해서는 민중민주투쟁을 강화해야 한다고 보아 그럴 수 있는 방안을 끊임없이 제안했다. 심지어 후보단일화가 안 된 상태에서는 선거를 치러 보았자 패배할 것이 명백한 데다 선거 후 부정선거규탄투쟁을 전개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차라리 선거 전에 관권과 금권을 총동원한 부정선거를 이유로 내세우면서 선거를 거부할 것을 제안하는 글(1987년 대통령선거 전망-1987.12.13)을 써서 내보내기도 하고, 대통령선거가 끝나고서는 민통련은 물론 학생운동까지 우왕좌왕하는 걸 보면서 대통령선거에서의 오류에 대한 올바른 반성에 기초해서 민중민주투쟁을 강화할 것을 촉구하는 글(선거혁명론의 오류와 후보단일화의 허실-1988. 1. 28)을 써서 내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석방되면 재야 운동권세력을 결집하여 정당을 건설할 것을 구상하고 있었다. 우선 양 김씨를 중심으로 한 야당세력으로는 민주화를 이룰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통령선거 전에는 김대중이나 김영삼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말이 유행했고(그렇게 되면 후보단일화가 이루어지기 때문), 선거 후에는 두 사람 모두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말이 유행했는데, 이 말은 양 김씨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건 물론 양 김씨가 있어서는 민주화가 안 되리라는 걸 의미했다. 그래서 이제 양 김씨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세력이 나와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재야민주세력이 정당을 건설해야 하리라고 보았다.

다음으로 그 동안 관성화된 운동권의 일반적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새로운 형태의 정당이 건설돼야 하리라고 보았다. 운동권은 대체로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를 이념으로 노동자계급 중심의 비합법 전위정당을 건설해서 폭력혁명을 단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됐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나는 사회주의가 아닌 민중주체민주주의 이념에 따라 국민대중에 기반하는 합법정당을 건설하여 선거에도 참여해야 하리라고 보았다. 그래서 나는 한편으로는 민중연합체로 민중민주투쟁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합법정당으로 국민의 지지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정당 건설 문제는 대단히 예민한 문제였다. 제도정치권에의 진입을 의미하는 합법적인 형태의 정당에 관해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운동권의 일반적 경향에 크게 배치되는 데다 운동권 안팎에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킬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이 문제는 내가 출소해서 직?추진할 문제이지 교도소에 있으면서 바깥으로 글을 써 보내 추진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정당건설과 관련해 많은 구상을 해두고서 대통령 취임식 때 석방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나는 이번 석방에서 제외되었고, 그러다 보니 그 동안 정당 건설과 관련해서 구상해 두었던 것도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대통령 선거 후 한동안 침통해 있던 운동권에서 4월 27일에 있을 국회의원 총선거와 관련해 정치적 진출이 논의되었다. 민통련은 개별적으로 정치활동에 나서는 것은 용인하되 선거에 직접 관여하는 일은 없이 민중연합을 강화할 것을 결의했다. 이러한 결정이 있고서 임채정, 이해찬 등 '비판적 지지'를 주도했던 상당수 인사들이 김대중의 평민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민통련 바깥에서 정당 건설이 추진되었는데, '인천지역 민주노동자 연맹'의 정태윤이 중심이 돼 '민중의 당'을 창당했고, 재야의 예춘호, 제정구, 유인태 등이 중심이 돼 '한겨레 민주당'을 창당했다. 민중의 당은 노동운동의 한 분파가 만든 사회주의 정당이었고, 한겨레민주당은 재야의 중심 인물들이 빠진 데다 이념적 정체성마저 모호한 정당이어서, 어느 것도 재야민주세력이 정당건설에 나선 것으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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