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금융부실 규모 계속 감추다간… 일본 교훈 잊었나
분명히 처음 만나는 사람이거나 처음 온 장소인데 이미 보거나 와 본듯한 느낌이 드는 현상을 데자뷰 또는 기시감(旣視感)이라고 한다. 과학자들은 이를 뇌세포의 착각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등 경제 분야에서 데자뷰가 나타난다면, 그건 과거로부터의 경고일수도 있다.
반복되는 금융위기에서 우리는 데자뷰를 경험한다. 카르멘 라인하르트 미 메릴랜드대 교수와 케네스 로고프 미 하버드대 교수에 따르면 지난 800년 동안 금융위기가 끊임없이 발생했지만, 그 때마다 사람들은 "이번만큼은 다르다(This time is different)"고 말해 왔다. 하지만 금융위기란 비슷한 이유로 생겨나고 비슷한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대공황 이후 주요 금융위기가 동일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반복적으로 발생해 왔음을 우리는 경험했다. 지금 유럽은 그리스, 스페인의 국가부채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은행들의 감추어진 부실이다. 금융부실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유럽은 큰 곤경에 빠질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경고한다.
그런데 이는 어디서 들어본 얘기인 듯 하다. 바로 1990년대 일본이 그랬다.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을 겪었던 것도 부실채권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버블 붕괴의 여파로 생겨난 부실채권 문제에 정면 대응하기보다 자연스럽게 해결되기를 기다렸다가 큰 낭패를 보았다.
일본은 92년 4월에 21개 주요은행의 부실채권이 8조엔이라고 처음 밝혔다. 그러나 구체적 내역이나 부실채권 기준은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금융시장에서 의구심이 커졌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즈지는 실제 부실채권이 42조~53조엔에 달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또한 어느 은행이 건실하고 어느 은행이 부실한지 알 수 없으니 일단 돈줄을 조이고 보자는 심리가 팽배해졌다. 돈이 돌지 않는 신용경색이 심해져 실물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자 금융당국은 정공법을 택했다. 은행에 대한 특별검사를 실시하여 정확한 부실채권 규모를 파악하고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에 따라 공적자금을 투입해 자본을 늘렸다. 하지만 대응속도가 너무 느렸다. 특별검사를 실시한 것이 부실채권 규모를 처음 공개했던 1992년에서 10년이나 지난 2002년이었고, 부실처리를 최종 완료한 시점도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05년이었다. 이때 발표된 부실채권은 1992년의 8조엔보다 무려 10배나 늘어난 77조엔이었다.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를 보면, 초반에는 유럽이 미국에 비해 타격을 덜 받았다. 부실채권도 미국보다 훨씬 적었다. 그러나 이후 행보가 달랐다. 미국은 발 빠르게 대응했다. 2009년 5월에 대형 19개 은행에 대한 스트레스 테스트를 실시하고 은행별로 잠재적 손실규모와 자본 부족액을 낱낱이 공개했다. 그리고 재정자금을 투입하여 자본증강에 나섰다.
하지만 유럽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2009년 10월에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를 공표했지만 은행별 정보는 공개하지 않았다. 또 "최악의 경우 2009~2010년 유로지역 은행의 손실액이 최대 4,000억유로에 달할 것이지만 자본증강은 불필요하다"고 발표했다. 독일과 스페인은 스트레스 테스트 자체에 심한 거부감을 드러내 의심을 샀다.
부실채권 규모를 감추고 은행별 정보는 덮어두면서 상황이 좋아지기만 기다리는 행태가 일본을 닮았다. 또 한 차례의 데자뷰를 경험하는 듯하다. 최근 들어 유럽은 스트레스 테스트 대상기관을 당초 20~30개 은행에서 100개 은행으로 확대하고 그 결과도 다 밝히겠다고 나섰다. 가장 미온적이었던 독일마저 동조하고 있다. 7월 중순에 결과가 발표될 예정이어서 국제금융시장은 이를 주시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번 스트레스 테스트가 요식행위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일시적 충격이 있더라도, 또 그 과정에서 일부 금융기관의 파산이 불가피하더라도 단 한번에 시장의 의구심을 해소할 수 있는 결과가 나와야만 유럽은 위기를 비켜갈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일본의 사례를 교훈 삼아 신속하고 투명한 정보공개가 중요한 시점이다.
정후식 한국은행 해외조사실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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