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7년(명종 22) 6월 28일 명종의 병이 위독해졌다. 중전 심씨가 승전색(承傳色) 전윤옥(全潤屋)을 시켜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 좌의정 이명(李蓂), 약방제조를 3경(三更)에 입시하라고 했다. 이 때 의정부에서 유숙하고 있던 이준경이 들어왔다. 그리고 영부사 심통원(沈通源) 병조판서 원혼(元混) 도승지 이양원(李陽元)과 사관 등이 입시했다.
이준경이 "전교를 받고자 한다"고 외쳤으나 명종은 이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준경을 가까이 오게 해 손을 잡았다. 이준경이 후사를 속히 정해야 한다고 말하자 팔을 들어 안쪽으로 향한 병풍을 두드렸다. 중전에게 물어보라는 뜻이었다. 이준경은 중전에게 후사에 관해 들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지난 을축년(1565) 명종이 아팠을 때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 이균(李鈞)을 후사로 삼았다"고 했다. 이준경은 다른 대신들과 양사 장관을 불러 이 전교를 함께 듣도록 했다.
그날 새벽 명종이 죽었다. 이에 이준경이 도승지 이양원 동부승지 박소립(朴素立) 주서 황대수(黃大受) 병조판서 원혼(元混)을 불러 시위장졸을 이끌고 가서 새로 될 임금을 모셔오라 했다. 이 때 황대수가 이양원의 허리띠를 잡고 "왜 어느 군(君)을 모시고 와야 할 것인지"를 묻지 않느냐고 했다. 이양원이 "이미 정해진 일이니 물어볼 필요가 없다"고 하니, 황대수가 "비록 이미 정해진 일이라도 이 일만은 그렇게 서둘러서는 안 된다"하고 "德興君第參子入承大統可也"(덕흥군제삼자입승대통하야ㆍ일부러 '三'자를 '參'으로 썼다)라고 12자를 써서 보인 다음 옷소매에 넣고 나갔다. 이양원이 창졸간에 말과 종이 없어 걸어서 가려 하자 황대수가 "지금 이 시기에 위의(威儀)를 잃어 보는 이의 이목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즉시 말과 따르는 사람을 갖추어 덕흥군의 집으로 갔다.
가서 보니 시위군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양원이 새 임금의 외삼촌 정창서(鄭昌瑞)에게 알려서 뵙고자 하자 황대수가 "마땅히 세 왕손을 다 나오라 해 직접 확인한 다음 모셔가야 한다"고 했다.
이 때 하성군은 어머니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의 상을 당해 상례를 치르고 있었다. 그러나 환관 이외에는 하성군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양원은 먼저 들어가 전교할 일이 있다고 하고 모든 형제를 뜰로 내려와 엎드리게 한 다음 그 중 세 번 째 엎드린 분을 모셔다 왕위에 즉위시키니, 이가 선조이다.
이와 같이 명종은 죽어가고 후계자는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원로대신인 영의정 이준경이 절차를 밟아 아무 탈 없이 대권을 승계하게 한 것은 큰 공로라고 칭송할 만하다. 그리고 창졸간에도 정확한 절차를 거쳐 새 임금을 모셔온 황대수의 지략도 높이 살만하다. 그러나 황대수는 일찍 죽어 크게 쓰이지는 못했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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