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적인 세계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출구가 없어 뚫고 나가기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따뜻한 것을 조금 동원하고 싶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라고 생각하고 소통의 가능성을 믿는 편은 아니지만,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서로 접촉하고 연대하는 건 가능하지 싶습니다."
소설가 황정은(35)씨가 등단 5년 만에 첫 장편소설 (민음사 발행)를 냈다. 원고지 410매 분량의 경장편으로 지난해 계간 '세계의 문학'에 전재됐다가 이번에 책으로 나왔다. 과한 묘사를 배제하고 간결한 설명과 대사로 이야기를 꾸려가는 황씨 특유의 여백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소설은 남녀 주인공인 무재와 은교의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여느 연애소설처럼 상대에 대한 감정에 도취한 연인의 연애담을 그리지 않는다. 이들의 사랑은 작가 황씨의 말을 빌리자면 '폭력적 세계에 갇힌 이들의 작은 연대'쯤 될까. 소설은 한밤중 낯선 섬에서 길을 잃은 이들이 손을 맞잡고 민가를 찾아나서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황씨는 "독자의 마음에 두 사람이 누굴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길 바라며 쓴 소설"이라고 말했다.
언뜻 동화적인 분위기까지 풍기지만 이 소설이 보여주는 오늘날의 문제적 현실에 대한 인식은 결코 만만치 않다. 은교와 무재가 처음 만난 곳은 도심의 전자상가. 쇠락한 5개 동으로 이뤄진 이 상가는 도심 재개발 명목으로 하나씩 철거될 운명에 처해 있고, 두 사람을 포함해 이곳을 생활 터전으로 삼고 있는 이들의 시름은 깊어간다.
서울의 세운상가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설정인데, 황씨의 아버지는 실제로 이곳에서 오랫동안 점포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5개 상가 건물 중 고작 한 곳이 철거됐을 뿐인데 일제히 '전자상가 철거, 역사 속으로'라는 제목을 뽑으며 남은 상인들의 퇴거를 기정사실화하는 언론, 철거된 건물 터에 조성된 공원에서 상인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매주 요란하게 치러지는 행사 등 시대의 흐름에 밀려난 자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적 상황들을 황씨가 이 소설에서 생생하게 짚어낸 것도 이런 실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소설의 또다른 묘미는 은교와 무재가 나누는 대화에 있다. 화제를 펼쳐나가기보다는 상대의 의중을 거듭 확인하고자 애쓰는 이들의 진중한 대화는 말이 자칫하면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타자를 향한 폭력으로 비화할 수 있음을 잘 아는 이들의 그것이다. "해 보세요, 가마./ 가마./ 가마./ 가마./ 이상하네요./ 가마./ 가마, 라고 말할수록 이 가마가 그 가마가 아닌 것 같은데요." 사람마다 머리 가마 모양이 다름을 화제로 삼은 이들의 대화는 이렇게 귀결된다. "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 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한 폭력인 거죠."(38쪽)
황씨가 첫 소설집 (2008)에서 유감없이 보여준 환상소설 기법은 그의 이번 장편소설에서는 '그림자'를 통해 되풀이된다. 은교와 무재, 그들의 가족, 전자상가 상인들은 가난, 소외, 폭력 등 극한 상황에서 자기 그림자가 일어나는 경험을 한다. 그림자 주인은 저 혼자 몸집을 키우면서 외따로 걸어가는 그림자의 뒤를 따르고픈 충동을 느끼고, 어떤 사람들은 그 결과로 죽음을 맞는다. 황씨는 "내버려두면 점점 자라서 사람을 압도해버리는 절망, 무력감, 불가능을 그림자에 비유했다"고 말했다.
재개발과 말과 그림자의 폭력 속에서 은교와 무재는 상처 입고 흔들리면서도 서로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순정한 마음을 잃지 않고자 애쓴다. 성교는커녕 그 흔한 포옹 장면조차 없는 연애소설이지만 그 안에 개인과 세계를 구원할 순수의 힘이 오롯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읽힌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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