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종룡이라고 합니다. 1941년 생이니까 이제 칠십 줄에 접어들었습니다. 골든에이지 후보라고 절 부르셨는데요, 제가 뭐 인터뷰감이 될까 모르겠네요. 특별히 내세울 게 없어 많이 쑥스럽습니다. 일단 제 소개를 하자면요. 40여 년 교직생활을 하다 2003년 서울 종암중 교장으로 정년퇴직을 했고요, 지금은 서울시청에서 발간하는 하이서울뉴스의 시민기자로 카메라 가방에 취재수첩 들고 현장을 뛰어다니고 있죠. 중간에 2006년부터 만 3년간 한국국제협력단(KOICA) 단원으로 우즈베키스탄에서 봉사활동을 했어요. 아마 그 일 때문에 절 부르신 거 같은데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에요.
학교를 떠나 한 2년간 다른 중학교에서 학교운영위원으로 일을 보태다 KOICA의 시니어 봉사단을 모집 소식을 들었고, 감히 지원해선 운 좋게 떠나게 된 거에요. 교직 중에 누리단이나 해양소년단 청소년적십자(RCY) 같은 단체활동을 이끌면서 자연스레 봉사활동에 눈이 떠있었죠. 2004년 우연히 인도네시아에 여행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본 빈민촌의 학생들이 너무나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를 해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언제든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나서겠다고 마음먹었죠.
KOICA 시니어 봉사단 지원
국문학을 전공한 까닭에 우즈벡의 수도인 타슈켄트의 국립세계언어대에서 한국어를 가르쳤어요. 학생들은 주로 러시아인하고 우즈벡인들이에요. 고려인들은 한두 명 정도 밖에 없었고요. 전공을 살려 1년간 집필해 그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국어 문법책도 냈어요. 음악을 이용한 교육도 재미났어요. 노래 가사를 공부시키는 것도 방법이겠다 싶어 도입했죠. 피아노, 플루트와 협연으로 제 특기인 하모니카 콘서트를 열기도 했어요.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10여 년 하모니카를 불었던 경력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하 이거구나 싶더군요. 한글날에는 백일장을 열었어요. 한국어를 배우려는 그들에겐 큰 행사였죠. 시는 어린 초등학생들이 중고생이나 대학생들보다도 훨씬 잘 썼어요. 주옥같다고 느꼈던 시들이 많았지요.
참 한가지 청이 있어요. 우리 초등학교 저학년 교과서를 해외에 많이 보급해줬으면 해요. 그만큼 좋은 교재는 없거든요. 우리말을 배우려는 외국인은 많은데 교재가 부족해 안타까웠어요. 우즈벡만 해도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학생들이 많아요. 한국에 공부하러 오려는 학생도 많고 한국 회사에 취직하려는 이들도 많기 때문이에요.
우즈벡 가기 전에 친구들한테 욕도 먹었어요. 쉴 나이에 뭐하냐는 거죠. 내가 하는 일이 옳으면 해야죠. 남의 눈치가 중요한가요. 친구들도 막상 다녀오니 잘했다고 부러워하더군요. 아내도 처음엔 허락하지 않았어요. KOICA에 내는 마지막 서류가 배우자의 동의서인데 도장을 안 찍어주는 거예요. 오래 설득해서 겨우 받아냈지요. 제가 가고 1년 있다가 아내가 우즈벡에 찾아와서는 그때서야 잘 했다고 칭찬을 해줬어요.
원래 임기는 2년인데 1년 연장을 신청했어요. 강좌를 다 끝내질 못해 1년은 더 해야겠다며 간절히 청했죠. 막상 더하려고 할 때는 후회도 들었어요. 혼자 버틴다는 게 무척 힘든 일이거든요. 밥도 해본 적 없던 내가 혼자 의식주를 다 챙겨야 하는 세월입니다.
건강하냐고요. 그냥 건강을 생활화 하려고 해요. 우선 아침에 무조건 헬스 1시간은 합니다. 그리곤 걷기 1km, 구보 1km를 섞어서 하고요. 우즈벡에서 혼자 살며 개발한 맨손체조를 곁들여 줄넘기도 하루 200번 합니다. 의사가 관절 때문에 줄넘기만은 하지 말라고 하네요.
등산으로 다진 건강
원래 등산을 좋아했어요. 40년 넘게 산을 올랐죠. 암벽등반학교 3개월 과정도 수료했어요. 그때 나이가 마흔여섯이었나. 몸무게가 86kg이 넘었을 때죠. 암벽 탈 몸이 아니었어요. 시험 보러 갔을 때 감독관이 그냥 가라고 손을 내젓더라고요. 그래도 꼭 해야겠기에 달라붙었고 결국 수료증을 받아냈죠. 지금도 인수봉 C코스 정도는 홀드 반, 자일 반 해서 올라갈 수 있어요. 지금 이 나이에 이렇게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는 건 등산의 힘이 컸다고 봅니다.
3년을 타국에서 살았다고 가정을 소홀히 했던 건 아니에요. 전 가정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3년을 독수공방하면서 더욱 가정이 소중한 줄 알았지요. 남을 나무라기 전에 칭찬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도 가정에서 먼저 실천하고 있습니다. 지켜보면 탓할게 왜 없겠어요. 하지만 무조건 감싸고 칭찬해요. 그럼 집안이 달라져요. 한 번 따라 해보세요. 교장을 할 때도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이 어려워하길래 먼저 칭찬하며 접근하니 금세 친숙해지더라고요. 전 학교에서 은퇴하자마자 양복 벗고 바로 민방위 점퍼로 갈아 입고선 집게와 비닐 봉지 들고 휴지를 주우러 다녔어요. 하루에 학교 세바퀴는 꼭 돌았지요.
일을 쫓아다니는 남편
남들이 제게 그러더군요. 일을 쫓아다니며 사는 사람이라고요. 전 인생의 첫 단추를 잘 뀄다고 봅니다. 40년 대과 없이 교장까지 하고 교직을 마쳤지 않습니까. 이제 두 번째 단추를 잘 꿰야죠. 지금은 단추를 구멍에 집어넣는 과정이에요. 첫 단추 꿸 때는 앞만 보고 살았다면 이젠 반성도 하고 주변도 돌아보고 살아야죠.
지금은 하이서울 뉴스에서 시민기자로 활동하고 있어요. 젊은 기자들과 비교하면 많이 서투르죠. 컴퓨터 자판을 1분에 300타씩 칠 순 없지만 노력으로 커버합니다. 이전 10여 년 간 취미로 찍어대던 사진이 많이 도움이 됐어요. 처음 6개월은 현장에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이제 보도가 이런 거구나 조금씩 깨닫고 있죠. 동적인 사진을 담아내라는 주문을 따르기가 왜 그리 힘들던지요.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끌어내는 과정에서 내가 주는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가도 깨닫고 있답니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재미있어요.
●이종룡이 말하는 봉사활동과 건강
우리 나이 되면 건강이 제일 중요하죠. 봉사는 이 건강을 유지하는데 아주 도움이 되는 일이에요. 할 일을 만들어 동선을 깔아놓고 움직이는 게 바로 건강을 챙기는 일입니다. 나이에 비해 젊게 살게 되고요. 무엇보다 용기가 생겨요. 무슨 일을 만나든 주저하지 않게 되고요.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한 거예요. 남을 위해 봉사한다는 생각은 또 마음을 참 젊게 만들어줍니다.
제 인생철학의 첫번째는 '노력'이에요. 노력 하나면 모든 게 해결됩디다. 그 다음이 '욕심을 버리라'입니다. 내 처지에 맡게 살면 마음이 편해지죠. 제2의 인생에 있어 봉사는 또 다른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대상이고요, 또 인생의 헛된 욕심을 멋지게 벗어 던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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