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이 있고 7개월 후 1960년 11월 지에 처음 발표된 작가 최인훈의 소설 은 발표 직후부터 문단 안팎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고 지금까지도 높은 평가 속에 읽히고 있는 현대의 고전이다. 4.19 혁명 50주년을 맞이한 올해는 이 세상에 나온 지 반세기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고전의 특징 중 하나는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이다. 그래서일까. 소설 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과 대화는 5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전혀 낡지 않는 '현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부잣집 오누이에 대한 작가의 묘사를 보자.
요즘 세태 꼭 집어낸 듯
'이들 오뉘에게 한 가지 좋은 데가 있다면, 부르주아의 집안 아이들이 흔히 갖는 덕, 즉 너그러움이다. 그저 그렇게 지내려면 좋은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지만, 사무치는 이야기 같은 것은 아예 밥맛 없어하는 사람들이다.' 열정 없는 초식동물이 돼버린 오늘의 일부 젊은 세대의 특징을 꼭 집어낸 듯하다.
기독교에 대한 설명도 정곡을 찌른다. '외국 같은 덴 기독교가 뭐니 뭐니 해도 정치의 밑바닥을 흐르는 맑은 물 같은 몫을 하잖아요? 정치의 오물과 찌꺼기가 아무리 쏟아져도 다 삼키고 다 실어가 버리거든요. 도시로 치면 서양의 정치사회는 하수도 시설이 잘 돼있단 말이에요. 사람이 똥오줌을 만들지 않고 살 수 없는 것처럼, 정치에도 똥과 오줌은 할 수 없지요. 거기까지는 좋아요. 하지만 하수도와 청소차를 마련해야 하지 않아요? 한국정치의 광장에는 똥오줌에 쓰레기만 가득 쌓였어요.'
오늘의 정치판이 반세기 전보다 맑아진 건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을 기독교의 기여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월간 의 서진한 편집인은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예전에는 예수쟁이라고 하면 싫어하면서도 그 신실성은 믿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금융거래에서도 목사 장로 교인이라고 하면 절차를 더 까다롭게 만든다고 합니다. 사회적인 신뢰, 도덕적인 신뢰도 완전히 잃어버린 것입니다.' 명색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종교 없는 일반인보다 훨씬 낮은 도덕적 평가를 받고 있어 은행 대출 심사에서도 훨씬 엄격한 규제를 받는다고 한다. 빛과 소금이기는커녕 도덕 파탄자로 지탄받는 한심한 모습이다.
이 소설의 압권은 뭐니 뭐니 해도'광장'이 죽어버린 우리 사회를 개탄하는 부분일 것이다. "저희들에게는 좋은 아버지였어요. 국고금을 덜컥한 정치인을 아버지로 가진 인텔리 따님의 말이 풍기는 수수께끼는 여기 있는 겁니다. 오, 좋은 아버지. 인민의 나쁜 심부름꾼. 개인만 있고 국가는 없습니다.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죽었습니다. 각기의 밀실은 신분에 맞춰서 그런 대로 푸짐합니다. 개미처럼 물어다 가꾸니까요. 좋은 아버지, 불란서로 유학 보내준 좋은 아버지. 깨끗한 교사를 목 자르는 나쁜 장학관. 그게 같은 인물이라는 이런 역설. 아무도 광장에서 머물지 않아요. 필요한 약탈과 사기만 끝나면 광장은 텅 빕니다.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광장은 비어있습니다."
광장 팽개치고 타락한 사회
스폰서와의 끈끈한 동지애를 과시하며 수시로 뇌물과 성 접대를 챙기는 검사들도 집에 가면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일 것이다. 그들이 밀실에서 질펀하게 즐기는 동안 광장에는 권력 주변에 기생하는 스폰서 '똥파리'들만 넘쳐난다.
소설 말미에서 주인공 명준은 광장 없는 남한 사회의 좋은 점은 '타락할 수 있는 자유와 게으를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라고 개탄했다. 타락의 자유를 밀실에서 한껏 누리는 그들이나, 팔은 안으로 굽게 마련이라며 형사 처벌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집단이나 모두 광장을 팽개쳤다는 점에서 오십보백보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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