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1월 말 대통령선거가 임박해옴에 따라 나는 지난날 김대중씨에게 대통령후보의 양보를 권유하면서 약속한 대로 김대중씨를 지지하는 편지를 써서 내보냈다. 내가 김대중씨를 지지한다고 해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리라고 본 것은 아니지만, 지난날 그를 지지하겠다고 약속한 일이 있는 데다 평소의 친분 때문에도 그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대중선생을 지지하실 것을 호소합니다'라는 제목의 편지였는데, 민통련은 이 편지를 '장기표 옥중 메시지 - 김대중 선생을 지지하실 것을 호소합니다'라는 소책자로 만들어 수 만부 배포했다고 하며, 평민당 또한 이 편지의 요약본을 평민당 당보에 실어 수 백만부 배포했다고 했다. 나는 이 편지에서 호남인들의 지역감정은 계급의식과 같은 것이어서 영남인들의 지역감정과 같은 차원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지역감정의 해소를 위해서도 호남출신인 김대중씨를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의 이 주장은 오랜 기간 호남 지역감정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그리고 김대중씨 지지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많이 인용되었다.
치열한 민주화투쟁의 승리로 치러지는 선거이고 또 이 땅에 민주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도 선거기간 내내 신명이 나지 않았다. 더욱이 김대중 후보와 김영삼 후보의 유세장에 100만 인파가 운집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선거에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나만 그랬던 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다. 그러니 입에서는 욕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쁜 ×들', '미친 ×들'이라고 말이다.
그런 가운데 선거가 1주일 정도 남았을 때 선거사범 3명이 홍성교도소에 구속됐는데, 김대중 후보 선거운동원들이었다. 찾아가 선거가 어떻게 돼 가느냐고 물었더니 김대중 후보가 틀림없이 당선될 거라고 했다. '4자 필승론'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김영삼후보가 사퇴하지 않는 것이 김대중 후보에게 더 유리하다'는 거였다. '표 계산이 끝났다'는 말도 했다. 아직 투표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표 계산이 끝날 수 있겠는가. 그만큼 선거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김영삼씨 쪽도 꼭 같았을 거다.
이런 와중에도 나는 선거승리를 위해서든 선거후의 부정선거 규탄투쟁을 위해서든 후보단일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아 당시 '민중후보'로 나선 백기완씨에게 편지를 썼다. '백기완 선생의 선거전략에 대한 제언'이란 이 글에서 나는 백기완 후보 진영이 선거유세의 일환으로 '후보단일화 실현 민중대회'를 개최해서 군정종식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해서는 후보단일화가 이루어져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는 후보단일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이틀이건 사흘이건 군중대회를 열 것을 제안했다. 명동성당 같은 곳에서 수만 명이 모여 양 김씨를 불러내어 그 자리에서 어떤 방법으로든 후보단일화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거였다.
그러나 끝내 후보단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12월 16일 선거에서 노태우 820만 표, 김영삼 630만 표, 김대중 610만 표로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양 김씨의 표를 합하면 노태우를 이기고도 남았다. 구로구청 부정선거 사건 등 부정선거 사례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으나 그것을 문제 삼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민주화를 눈앞에 두고도 야당 후보의 분열로 선거에서 패배했으니 부정선거 때문에 노태우가 당선됐다고 말할 염치가 없었다.
아무튼 김대중, 김영삼 양 김씨의 후보분열은 민주세력에게 엄청난 타격을 가했다. 뭇 사람의 생명까지 바쳐가면서 얻어낸 민주화투쟁의 성과를 수포로 만들었고, 6월 민주항쟁의 그 뜨거웠던 감동을 허탈감으로 바뀌게 했으며, 민통련을 중심으로 한 재야민주세력의 분열을 가져와 오늘까지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게 했다. 또 양 김씨의 후보 분열은 지역감정을 이전까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격화시켰다. 무엇보다 수사기관이나 제도언론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은 민주화보다 자신의 집권만을 바라는 권력욕의 화신'이라면서 '양 김씨는 반드시 분열할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야당분열공작'이라고 비난했었는데, 그런 말이 사실로 판명되었으니 쥐구멍이라도 찾아야 할 판이었다.
1987년의 그 장엄했던 '6월 민주항쟁'의 뜨거웠던 민주화 열정을 보고서도 후보단일화를 거부함으로써 민주화를 무산시킨 김대중과 김영삼은 그들이 저지른 역사적 죄과에 대해 사죄하고 정계를 떠났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과 한마디 제대로 하지 않고 정치를 계속했다. 그들을 맹종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큰 문제는 민통련을 비롯한 민중민주세력에게 있었다. 민중민주세력이 올바른 노선을 견지했던들 그런 사이비 민주세력에게 휘둘릴 턱이 없었다. 우리의 무능과 실책이 더 큰 문제였다.
선거 후 민통련은 초상집 같았다. 김대중씨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했다가 낭패를 본 것이 민통련을 어렵게 만든 주된 요인이었지만 이에 못지않게 비판적 지지파와 후보단일화파의 심각한 갈등도 그 요인 중 하나였다. 나는 민통련 강화를 주장했기 때문에 비판적 지지파나 후보단일화파에 속하지 않은 데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어 선거패배의 후유증에 덜 시달렸으나 밖에서 활동하던 민통련의 주요 간부들이 겪은 시련과 고통은 실로 엄청났었다.
민통련의 문익환의장은 선거가 끝난 직후 민통련이 후보단일화를 이루어내지 못한 채 김대중씨를 지지함으로써 군정종식을 실패케 한 데 대해 국민에게 사죄하는 단식을 보름 동안 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민통련에 대한 비난이 사그라질 수는 없었다. 도처에서 민통련을 비난하는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결국 1988년 1월 문익환의장을 비롯한 지도부와 중앙집행위원 전원이 민통련의 실책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강희남 대의원대회 의장 중심으로 임시 지도부를 구성했으나 명맥을 유지할 뿐 사실상 파탄상태였다. 구속자 석방을 위한 투쟁 등 이런저런 활동을 했으나 맥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민통련 재건을 위해서는 구속되어 있는 중요인사들이 석방돼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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