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그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았어. 원망도 안해, 잊어버려야지."
6ㆍ25전쟁 60주년을 기념 혹은 기억하느라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고 있지만 정작 그는 덤덤했다. 60년 묵은 고통과 한(恨)은 일상이 된 듯 평온했다. 23일 6ㆍ25전쟁 전사자의 부인 이종숙(84)씨는 "이젠 잊고 싶다"는 과거의 실타래를 풀어나갔다. 때론 웃고 때론 울먹였다.
이씨처럼 사랑하는 이를 전쟁터에서 잃고, 홀로 또는 어린 피붙이와 함께 신산(辛酸)의 세월을 버틴 전사자의 부인 예닐곱 명이 곁을 지켰다. 이날 서울 마포구 공덕동 전몰군경미망인회 사무실엔 기자가 유일한 외부인이었다.
1961년 6월 어느 날, 이씨는 잔뜩 골이나 있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시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 OO(아들)가 현충원에서 지 아버지 비석을 봤다고 울고불고 하네요." 시아버지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래, 어찌 알았나."
이씨는 울먹이며 말을 이어갔다. 전쟁이 나던 해 제1국민병으로 입대한 남편(당시 24세)은 3년 가까이 사선을 넘나들다 1953년 휴전직전 강원 철원군에서 순직했다. 이씨는 남편의 전사통보만 들었을 뿐 어디 묻혔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8년이 지나 초등학생이 된 아들이 우연히 현충원 묘역을 청소하다가 아버지 이름을 발견한 것이었다. 아들은 충격으로 앓았고, 어미는 가슴이 찢어졌다.
시아버지는 아들이 현충원에 묻혀있다는 걸 알면서도 "며느리가 충격을 받을까 봐 숨겼노라"고 했다. 이씨는 "무슨 이유든 남편 묘가 있다는 사실은 알려줬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따졌다. 원망과 서러움에 떨던 이씨는 며칠 후 아들과 함께 시댁을 떠났다.
이씨의 나머지 삶의 기억은 병마와의 싸움뿐이다. 60~70년대 고정수입이라곤 일년에 두 번 나오는 총 500원(당시 쌀 한 가마는 5,000원)의 유족연금이 전부였다. 저고리 삯바느질로 연명했고, 아이를 키웠다.
굶주리고 쇠약해진 탓에 저고리 하나를 붙잡고 이틀을 보내기 일쑤였다. "간장 비빈 보리밥 먹고 잠 안 오는 약 먹어가며 일했지." 폐결핵, 심장병 등 너무 아픈데 누울 힘조차 없었다. "사람들이 맨 다리를 내놓지 말라고 했어. 뼈만 앙상한 정강이가 칼 같아서 징그럽다고."
그래도 이씨는 고작 2년 함께 산 남편을 평생 원망하지 않았다. 다만 아쉽다고 했다. "입대 직전에 배고프다고 하길래 떡 몇 덩어리 사왔는데 그새 갔더라고. 떡은 울면서 내가 먹었지. 그거라도 먹였으면…." 이씨는 그날 백일 갓 지난 아들을 업고 성동역전(현 서울 지하철1호선 제기역)을 찾아 헤맸지만 남편을 만날 수 없었다. 그게 끝이었다.
이씨는 여전히 혼자다. 아들(60)은 지방에서 식당 일을 하느라 기댈 처지가 못 된다. 이씨는 노량진동에 단칸방(보증금 500만원, 월세 15만원)을 얻어 산다. 국가 지원은 그나마 나아져 월 109만원을 받는다. "그게 전부야. 노인연금도 없고, 생활보호대상도 안 된대."
지금껏 사회적 관심은 바라지도 않았다. 기력 닿는 대로 열심히 살았을 뿐. "세상 원망도 많이 했지, 근데 그럼 뭐해. 이제 다 잊을래. 며칠 전에 현충원 가서 남편한테 그랬어. '잘 가라'고 이젠 잊을 거라고. 60년이면 충분하잖아." 웃음 속에 서글픔이 있었다.
미망인회에 따르면 현재 6ㆍ25전쟁 전사자의 부인은 3만4,000명, 베트남전 등 기타 상이군경까지 합하면 10만9,000명이다. 그들은 무관심 속에서도 악착같이 살아남았고 현재 슬픈 노년을 보내고 있다.
남상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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