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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60주년/ 살얼음판 남북, 개성공단이 '유일한 끈' 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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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60주년/ 살얼음판 남북, 개성공단이 '유일한 끈' 으로

입력
2010.06.24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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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동기에 의해 출발했지만 남북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

2003년 6월 첫 삽을 뜬 개성공단 사업의 현 주소다. 분단 이후 남북 사이에는 수많은 교류가 있었지만 개성공단만큼 지속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성과를 내고 있는 협력 사업은 드물다.

개성공단도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합의로 시작돼 사업성 보다는 상징의 의미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성과를 빨리 내야 한다는 조급증에 시범단지 조성 시기는 1년 앞당겨졌고, 2004년 12월 세상에 나온 첫 생산품도 냄비에 불과했다. 당시만 해도 남한의 기술과 자본, 북한의 토지와 노동력이 어우러진 결과치곤 다소 기대에 못미친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6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개성공단의 성과는 놀랍기만 하다. 2005년 18개에 불과했던 가동 기업수는 120여개를 헤아린다. 4만3,000명의 북한 근로자가 남한 기업들을 위해 일하고 있고, 3월에는 월별 생산액이 3,000만 달러를 돌파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일각에서는 경제성을 떠나 '경제 안보'의 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개성공단의 의미를 찾기도 한다. 공단이 들어선 부지는 황해북도 개성직할시와 판문군 평화리 일대 330만㎡이다. 북한은 이 곳에서 수도권을 겨냥하고 있던 장사정포 부대와 북한군 2군단을 후방으로 빼냈다. "휴전선을 10~12km 북쪽으로 밀어 올렸다"는 해석이 나올 정도로 북측으로선 '통 큰 결단'이었다.

개성공단의 저력은 남북관계가 살얼음판을 걷는 위기 속에서도 명맥을 이어왔다는 데에 있다. 북한이 2008년 12월 남측 민간단체의 대북전단(삐라) 살포를 문제 삼아 육로통행을 제한했던 '12ㆍ1 조치', 2009년 5월 북한의 2차 핵실험 와중에도 공장 가동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 정부가 천안함 침몰의 책임을 묻기 위해 남북 교역을 전면 중단한 상황에서도 개성공단은 살아남았다. 연간 4,000만 달러의 외화 수입을 포기할 수 없는 북한과 121개 기업의 생존권을 외면할 수 없었던 우리 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측면이 컸지만 개성공단만이 유일하게 남북관계의 완충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까닭에 전문가들은 천안함 사태의 출구전략으로 개성공단을 적극 활용할 것을 주문한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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