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소리밖에 기억이 안나."
23일 오후 서울 둔촌동 서울보훈병원에서 만난 이해윤(77)씨. 1953년 서울 수도사단 소속으로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 나섰다 부상을 입은 그에게 남은 토벌전 기억은 수류탄 폭발음이 전부다. "쾅 하면서 쓰러졌어. 등에 업혀 내려왔는데, 어떻게 된 건지, 내 옆에 누가 있었는지 모르겠어."희끄무레한 초저녁 지리산 풍경, 지리산 뱀사골 능선을 낮은 자세로 올라가던 기억. 수류탄을 던지던 빨치산들. 그게 다였다.
이씨는 그 때 부상으로 3급 장애를 앓고 있다. 왼쪽 무릎 인공관절을 3~4년 주기로 바꾸는 수술을 13번이나 했다. 보훈병원에서 수술은 무료로 해주지만, 수입하는 인공관절을 제 때 구하지 못해 수술 일정이 늦춰지기 다반사다. 이씨는 "미군 식당 설거지하면서 살았어. 60년 가까이 병원에만 있었어. 언제부턴가 생각을 안 하려고 하다 보니까 기억이 조금씩 지워져"라고 말했다.
50년 입대를 위해 경기 남양주시의 한 동네에 모인 150여명의 또래 젊은이들. 쌀 한 가마니를 등에 짊어지고 열흘을 걸어 도착한 경남 김해의 한 교육대대. 총을 어깨에 짊어지고 부산을 거쳐 제주도까지 이동했던 기억. 어느 것 하나 구체적인 건 없었다. 그는 "설악산 향로봉 전투에도 참가했어. 거기서 총에 맞았는데 어디지"라고 몸을 뒤져보기도 했다.
그에게도 뚜렷한 기억이 있다. "안창수! 이문영!" 그와 함께 입대했던 군대 동기이자 함께 지리산을 누볐던 전우들이다. 하지만 보고 싶으시냐는 질문에는 "아니"라고 짧게 답했다.
마침 병실을 돌던 보훈병원의 한 간호사는 "이 할아버지 작년에 뇌수술을 했어요"라고 전했다. 기억을 잃어버린 건지, 의도적으로 지운 것인지. 이씨는 "기억이 안나"라는 말만 반복했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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