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1월 4일 제출된 사표는 보름이나 지나서 부산일보 권오현 사장과의 마지막 면담을 거치면서 수리됩니다. 그 동안 무수하게 들었던 우려의 잔소리들.
-"나이 서른 다섯에 직장을 그만 두고 어떻게 살아 갈래?"
저는 그럴듯한 사유를 둘러 대었습니다.
"제가 쓴 시나리오가 올해 영화화되어 극장 간판에 걸립니다.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라고. 이두용 감독 같은 분은 연출부에서 일하면서 세편 정도 시나리오를 써내면 저를 감독으로 데뷔시켜준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핑계거리는 주로 신문사 동료와 직장 상사분들에게 둘러댄 사직의 변입니다.
"도저히 이대로 글쓰기를 포기할 수는 없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전업 작가의 길을 걸어 보겠어." 이건 아내에게 한 핑계입니다. 그 해 초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제가 쓴 단편소설이 최종심에 오르기도 해서 아내는 제 말을 믿었습니다.
"다시 연극을 하겠다는 십 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라는 것도 사실 당시 상황으로서는 불투명한 희망사항에 불과했습니다. 연극이란 게 저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닌데, 신문기자 하던 작자가 갑자기 연극판에 뛰어들어 어디서 배우와 스태프를 모은단 말입니까? 제가 다시 연극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결과적으로 다행스런 일이었을 뿐입니다.
그럼 왜? 라고 묻는다면,
세상과 나 자신에 대한 환멸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게 정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그렇게 격렬했던 80년대 벽두의 상황은 우리에게 '시대정의의 그늘 아래 서 있는 지식인'이라는 입장을 부여했고, 우리는 나름의 방식으로 응전했습니다. 저는 시인으로서 비평가로서 신문기자로서 스스로 시대적 책무의식에 시달려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군부 체제는 자체 모순을 감당하지 못하고 해체되는 국면에 처합니다. 무엇보다 자유경제 체제를 물적 기반으로 하는 우파 국가 이데올로기가 정립되지 못했습니다. 지식인라면 누구도 우파의 그늘 아래 서기를 회피했습니다. 무의미시론의 김춘수 시인이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내세워지면서 김춘수 류의 순수 절대시는 졸지에 비현실적인 언어유희란 힐난을 받으면서 문학적 관심에서 밀려나버립니다. 그래서 80년대 중반에 이르면 민주 민중 민족주의 논리가 사실상의 시대적 대세를 이룹니다. 그러나 민주 민중 민족문학 진영에서는 자체 내 노선 투쟁이 시작되면서 내부 분열에 빠져 듭니다. 좀 더 극단적으로 좌편향의 길을 선택한 관점들이 그렇지 못한 선배 세대들을 현실추수주의 체제순응주의 등의 이름으로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꽃을 노래하던 시인들이 갑자기 노동자와 창녀를 위한 시를 유행처럼 짓고, 너도 나도 민중의 대열 속으로 합류합니다. 저는 개인적 고민이 거세되고 집단논리가 득세하는 문학판 그 자체를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언어의 쓰레기장처럼 느낍니다.
순수문학으로 포장된 제도권 문화가 힘을 잃기 시작하는 80년대 중반은 상대적으로 어중이떠중이 식 민중문화가 득세하는 시기였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한 대중성을 지닌 키치 문화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장정일은 천연덕스럽게 말합니다. "나는 포르노 영화 한편을 그대로 베껴서 한 권의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주사파의 논리가 득세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서사적 글쓰기가 의미를 잃어버리는데, 얼치기 시민문학론을 펼치던 저는 이 극단의 한 가운데 자조적인 돌팔매질을 합니다. "회색도 색이다! 나는 차라리 당당한 회색분자로 남겠다."
사회 분위기도 바뀌기 시작합니다. 격렬했던 상황은 진정국면에 접어들고 저마다 제 밥그릇 챙기는 세상처럼 느껴집니다. 데모는 계속되는데 빛 바랜 깃발처럼 여겨집니다. 직장이건 동인단체건 내부 분열과 편짓기에 시달립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에 인간은 의외로 강인한 생명력과 저항력을 자가 발전시킵니다. 오히려 긴장이 완화되는 시기가 인간을 부패시킨다면, 그 분수령이 86년에서 87년에 이르는 시기였다고 생각됩니다. 정치적으로 DJ와 YS의 분열, 이어지는 정치적 야합은 시대 정의의 그늘 아래 서고자 했던 지식인들을 치명적인 회의에 빠져들게 했습니다. 이제 명분도 체면도 사라졌다. 모두 제 밥그릇 챙겨 들고 앞으로-
글쓰기에 대한 회의도 극에 달합니다. 너무 많은 글과 논리가 쏟아졌고, 생경하게 현실과 뒤엉키다 보니 상상력의 공간과 율격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쓰는 문체와 이미지가 우리의 정서에 닿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우리는 번역 투의 문체와 수사법 속에 시를 가두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절망감에 빠져 들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현대시라는 것이 이미지와 사유?공간에 있어서 향가에 미치지 못하고, 리듬에 있어서 고려가요보다 못하다는 것, 어쩌면 우리가 몸담고 사는 20세기가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천박한 암흑시대로 기록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들기도 했습니다.
결국 80년대 봄에 피어나기 시작한 정치와 문화의 강력한 동반자 의식은 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너는 그 해 5월 어디에 있었고,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처자빠져 있니?"란 냉소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저는 이 냉소적인 질문에 분명하게 답변하지 못하고 스스로 파산 선고를 내립니다. 그러면서 김종삼의 시 한편을 기억해 냅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 아닌 人間을 찾아다니며 물 몇 桶 길어다 준 일 밖에 없다고
-김종삼의 시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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