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회의 땅을 지켜라" 뚝심의 LG가 남아공 국민 브랜드 됐다
"드럼세탁기 중에 삶아서 빠는 스팀 기능을 가진 제품이 있나요? 세탁 속도가 좀 빠른 모델이었으면 좋겠습니다만…. 가격은 상관 없습니다."
지난 달 말,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도 부유층이 모여 산다는 포웨이 지역의 대형 전자쇼핑몰인 몬테카지노내 LG전자 엑스피어린스 매장. 올 가을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 에델인(24)은 제품 설명서를 보면서 점원과 함께 꼼꼼하게 세탁기를 살폈다. 이 매장의 체슬린 이삭(36) 직원은 "LG 드럼세탁기는 경쟁사에 비해 30% 이상 비싼데도, 찾는 사람들이 많다"며 "1,500달러가 넘는 고가 제품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고, 조만간 2,000달러가 넘는 고급 제품도 들어올 예정"이라고 전했다.
아프리카 중심부인 남아공에서 LG전자의 '백색 바람'이 거세다.
주력 품목인 가전 제품을 앞세워 검은 대륙의 한복판인 남아공을 프리미엄 백색으로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모진 풍파와 맞서기를 올해로 벌써 15년째, LG전자 남아공 법인이 아직까지도 멀게만 느껴지는 아프리카를 '기회의 땅'으로 바꿔 놓고 있다.
외환위기에도 현지 법인 고수…신뢰 지켜
남아공에서 LG는 '국민 브랜드'로 통한다. 택시 운전기사에서부터 청소부까지 남아공에 사는 사람이라면 LG 브랜드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정도다. LG 브랜드는 그 만큼 이 곳에서 높은 인지도를 자랑 한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LG가 하루 아침에 스타 브랜드의 반열에 오른 것은 아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15년 동안 한결 같이 남아공을 지켜온 LG전자 현지 법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평이다.
첫 번째 위기는 1998년에 찾아왔다. 남아공에 진출한 LG전자 지사가 법인으로 승격된 이후, 불과 2년 만에 '외환위기'가 들이닥친 것. "글로벌 브랜드는 모두가 남아공을 떠나갔어요. 물건을 팔면 팔수록 손해가 났으니까, 당연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LG전자는 (남아공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2008년 LG전자 최초의 현지인 법인장으로 선임된 피트 반 루옌(48) 상무는 당시 남아공 전자 업계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해 냈다. 위험한 선택으로 보였지만 남아공의 성장 잠재력을 높게 평가한 LG전자가 현지 법인 존속 방침을 굽히지 않았던 것은 고객들과 약속한 신뢰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에 남아공 소비자들은 2003~05년 사이 소니와 파나소닉 등 글로벌 업체를 제치고 현지에 진출한 전자 업체 가운데 LG전자를 최고 브랜드(남아공 브랜드 전문 조사기관인 마르키노 설문)로 선택하며 화답했다. LG전자의 뚝심경영이 빛을 발한 셈이었다.
드럼세탁기 등 주요 전자제품 점유율 1위
미국발 금융위기로 수 많은 업체가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던 2008년에도 LG전자는 남아공 법인 유지 전략만큼은 끝까지 고수했다. 오히려 법인장을 포함해 판매와 마케팅 담당 직원들을 현지인으로 기용하면서 정면돌파를 시도하고 나섰다. 라이언 후커(37) LG전자 남아공 법인 판매 책임자는 "유통 채널과의 파트너십 형성 등을 포함한 비즈니스 진행 과정에서 피부색이 같다는 이유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미셀 포트기터(43) LG전자 남아공 법인 마케팅 책임자도 "LG전자는 이 곳에서 많은 현지인들을 채용하고 있는 덕분에 소비자들 사이에서 따뜻하고 감성적인 기업이란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LG전자 남아공 법인은 현지 관계 당국이 시행 중인 흑인우대정책(BEE) 단계(1~8등급)에서 외국 기업으로는 드물게 6등급까지 올라 있다. BEE 단계가 상위권에 올라 갈수록 각 기업은 남아공 정부로부터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덕분에 탁월한 영업 성과도 거두고 있다. 시장조사기관인 GfK와 업계에 따르면 올해 4월을 기준으로 드럼세탁기(40%)와 에어컨(30%), 전자레인지(35%), 홈시어터(30%) 등의 분야에서 압도적인 시장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피트 반 루옌 법인장은 "고객들의 숨은 욕구에 적합한 제품을 출시하고 브랜드 파워도 지속적으로 높여 나갈 계획"이라며 "기존에 강점을 갖고 있는 가전 제품은 물론 휴대폰과 TV 등의 경쟁력을 높여, 올해는 전년대비 30% 증가한 60억 달러의 매출 목표를 달성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강영수 KOTRA 요하네스버그 센터장
"도로는 좁은데, 자동차는 계속 늘어나고 있어요. 대형 전자상가에 가보셨습니까? 가전제품이나 휴대폰을 사려고 사람들이 밀려듭니다."
강영수 KOTRA 요하네스버그 센터장에게 남아공의 성장 잠재력을 묻자, 돌아온 답변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었지만, 강 센터장은 현재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남아공의 실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특히"자동차를 사기 위해 흑인들이 자동차 매장에 자연스럽게 오고, 골프장에서도 흑인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며 최근 남아공 변화의 중심엔 흑인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이어 "산업화에 편승해 퍼져가고 있는 흑인들의 이 같은 소비성향을 잘 이용한다면 보다 많은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도로망과 전기, 철도, 통신 등 사회적으로 취약한 각종 인프라 구축에 여념이 없는 남아공의 현재 상황을 우리 기업들이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막연한 기대감으로 남아공에 진출할 경우, 그 만큼 실패할 가능성도 높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현지 시장 조사를 해야 합니다. 비즈니스에 앞서, 직접 남아공 현장에 와서 이 곳 사람들의 습성과 문화, 생활환경 등을 반드시 살펴봐야 하거든요. 이 점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사전 시장조사 미숙으로 아무 소득 없이 한국으로 돌아간 기업인들을 많이 봤다고 했다. 기회가 많은 만큼,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성도 적지 않다는 얘기다.
그는 "신흥시장 개척과 시장의 다변화를 추구해야 하는 우리나라 현실을 감안할 때, 아직까지 낙후된 남아공 진출을 서둘러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 삼성·현대차·포스코…남아공 중심으로 아프리카 곳곳 진출, 현지 마케팅에 주력
남아공을 중심으로 아프리카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은 주요 판매 거점 확보와 생산기반 마련 등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해 말, 단행한 조직개편에서 남아공에 아프리카 지역 총괄을 맡긴 삼성전자는 모로코와 나이지리아에 법인을 두고 이집트와 알제리, 케냐, 튀니지 등에는 지점을 갖추고 있다. 올해 4월부터는 아프리카 밀착 경영 방침 아래, 현지에서 근무할 주재원을 모집하고 있다.
이집트 카이로에 아프리카 지역본부를 둔 현대차도 남아공과 알제리, 나이지리아, 모로코 등에서 현지 맞춤형 마케팅을 강화하고 있다. 2007~08년 사이, 아프리카 자동차 수요가 142만여대에서 133만대 수준으로 줄었지만 이 기간 동안 현대차의 시장 점유율은 오히려 10%에서 11.3%로 증가했다.
LG전자도 아프리카 6개 지역에 현지 법인을 두고, 직영서비스 센터를 운영하는 한편 사회공헌활동 등을 펼치면서 브랜드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다. LG전자는 현재 시장에서 1위를 질주 중인 주요 가전제품(세탁기, 에어컨, 홈시어터, 전자레인지 등)의 점유율을 모두 35% 이상으로 끌어올릴 방침이다.
포스코의 경우, 원료 확보를 위해 아프리카에 진출했다. 2008년 남아공의 칼라하리 망간 광산의 13% 지분을 인수한 포스코는 연간 13만톤 이상의 망간 공급을 기대하고 있다. 최근에는 짐바브웨에서 규석 공급 협력을 추진 중이며 모잠비크에선 현지 업체와 석탄 개발을 위한 계약도 체결했다.
이 밖에 한화그룹은 석유화학과 건설 분야 등에서 아프리카 공략을 서두르고 있으며 두산인프라코어 및 금호타이어, 한국전력, 대한전선 등도 남아공에서 활발하게 비즈니스 폭을 넓혀가고 있다.
요하네스버그(남아공)=허재경기자 rick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