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이끼'가 개봉(7월 15일)도 하기 전, 이번 주 새 영화 '글러브' 촬영에 들어간다. 아무리 충무로 파워맨으로 꼽히는 인물이라 해도 이례적인 행보다. 누구는 "그런 부지런함에서 위기감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최근 서울 충무로 시네마서비스 사무실에서 만난 강우석(50) 감독은 이를 강력 부인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제야 감독이 천직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하다"며 부쩍 늘어난 연출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다. 몇몇 대기업이 영화판을 쥐락펴락하고, 최근 자신이 제작ㆍ투자한 영화들이 패퇴를 거듭하는 상황에서도 이 충무로 최고 흥행술사의 얼굴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이끼'는 2008년 인터넷 연재로 큰 인기를 끌어 모은 윤태호씨의 동명 만화를 바탕으로 했다. 아버지의 과거를 찾아 어느 괴이한 마을에 들어가게 된 한 사나이와 마을 사람들의 핏빛 어린 사연을 담았다. 아무리 인기 만화라지만 강 감독은 "투자해달라는 부탁을 거절할 명분을 찾기 위해 읽었다"라 말할 만큼 당초 그의 안중에도 없었던 작품이다.
"읽다가 '이거 봐라…'하며 빠져들었다. 연출을 맡을만한 감독들을 하나 둘 지워가다 보니 결국 내가 하게 됐다. 무의식적으로 내가 하고 싶었나 보다. 찍고 나니 '투캅스'와 '공공의 적' 때 느꼈던 상쾌함이 남았다."
그는 "그림이 있는 좋은 원작이니 아주 쉽겠다 생각하며 덤벼들었는데 가장 힘들게 찍은 영화였다"고 밝혔다. "영화를 힘들게 찍으면서 막판 에너지가 생겼고, 그 에너지로 좋은 영화 있으면 하나 더 찍고 싶다 생각하던 중 '글러브'가 걸려든 것"이라고 덧붙였다. '글러브'는 청각장애인 야구부를 배경으로 한물간 프로야구 선수와 여교사의 사랑, 야구부원들의 우정 등을 그린다.
"예전엔 돈 구하러 다니고 투자 이야기하면 재미있었는데 지금은 짜증만 난다. 그런데 '이끼'를 찍으며 새벽에 촬영지 헌팅(물색)을 다녀도 전혀 졸리지 않더라. 한때는 감독 그만두고 애들 공부하는 캐나다로 떠나고 싶은 적도 있는데 '이끼'로 연출에 대한 맛을 느꼈다. 아마 '이끼'는 언론이 나를 감독으로 인정할지, 파워맨으로만 볼 것인지 정확하게 판단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강 감독은 2002년 '공공의 적'을 시작으로 '실미도' '공공의 적2' '한반도' '강철중: 공공의 적 1-1' 등 연출작 모두 300만 관객을 넘겼다. 그가 투자한 '왕의 남자'는 1,200만 관객이라는 잭팟을 터트렸다. 그러나 최근 그가 투자ㆍ제작한 '김씨 표류기' '백야행' '주유소 습격사건2' '용서는 없다' 등은 흥행전선에서 잇달아 쓴 잔을 들이켰다. "흥행 감각이 예전만 못한 것 아니냐"는 반응이 충무로에서 흘러나온다.
"1999년엔 내가 간여한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텔미썸딩' 등 여섯 작품이 연달아 터졌다. 사람들이 어이없어 할 정도였다. 최근 흥행 실패한 영화들이 당시 영화들보다 뒤떨어지는 기획은 아니다. 물론 영화를 보는 내 눈이 달라졌다. 10여년 전엔 흥행에만 집중했는데 이제는 작품성에 신경이 쓰인다. 잘 만들고 흥행도 잘 되면 좋지 않나? 오래 가는 영화를 찾아보자는 생각이 강하다."
그는 현재 활동하는 감독 중 원치 않게도 원로급에 해당한다. 그도 "최근 이창동, 김유진 감독과 술을 마셨는데 '대한민국 원로 중 임권택 감독 빼고 3명이 모였다'며 농담을 나눴다"고 했다. "감독층이 이렇게 얇아졌나"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책임감을 느낀다.
"지금까진 영화를 흥행시키며 즐기는 쪽이었는데 이제는 이름 석자에 책임을 져야 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단지 많이 만들고 오래한 선배 감독이 아닌, 작품으로 오래도록 남아야 하는 시간이 오고 있는 듯하다. 영화에만 미쳐있으면 또 뭔가가 되지 않겠는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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