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아내가 두부를 사오라고 명령하면(?) 나는 졸린 눈을 부릅뜨고 반드시 P상표의 두부를 확인한다. 우유 심부름을 시키면 예전에는 꼭 P우유를 구입했다. 하나는 빈민 활동으로, 또 하나는 민족사관학교를 세워 사회에 이바지한 그네들의 순연한 정신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P우유가 다른 이에게 넘어가고 민족사관학교와 무관하다는 뉴스에 이제는 다른 우유를 구입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논란
자본주의의 본산이자 시장주의 국가인 미국의 소비자들도 조금 깨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하겐다스보다는 벤 앤 제리(Ben&Jerry)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아마존의 열대 우림을 지키기 위해 거액을 지원하는 등 사회 공헌 활동을 높이 사기 때문이다. 스타벅스를 즐기는 소비자들은 조금 비싸지만 스타벅스가 파트타임 직원에게도 의료보험을 제공하는, 미국에서 보기 드문 회사라는 점에서 매장을 찾는다.
이처럼 기업이 사회에 안기는 다양한 공헌 활동에 우리는 감격해 하며 애써 해당 회사의 제품을 구입한다. 그러나 기업의 사회적 활동은 시장주의자들의 혹독한 비판에 직면한다. 시장주의자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을 시장주의와 자본주의의 근간을 심각하게 해치는 행위라고 비판한다. 기업이 사회문제에 신경 쓰는 것은 그만큼 불필요한 비용을 증가시켜 주주들에게 돌아갈 이익을 감소시킨다고 주장한다. 그 비용은 결국 제품 가격에 전가되어 고객들에게 피해가 돌아가고 기업의 경쟁력 상실로 신규 고용에 실패하게 된다는 논리다.
궁극적으로 국가 경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나름대로 논리가 있으면서도 설득력이 있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이 주창하고 밀턴 프리드먼 등이 강력히 주장한다. 그는 기업의 사회적 공헌 활동을 탈법이나 불법행위 등 위기 국면에 대비해 소비자들의 동정을 노리는 보험 들기에 다름 아니라고 거세게 쏘아 부친다.
한국에서 이 같은 주장은 보수꼴통이나 가진 자, 또는 시대정신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 정도로 욕먹기 쉽다. 설사 문제점이 드러나더라도 그 또한 시장의 기능에 맡겨야 한다는 시장주의는 한국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비판 받고 있다. 그래서 많은 경제학자들은 실제로 시장주의를 강력히 지지하면서도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데는 주저한다. 재미있는 것은 시장주의를 반대하며 CSR을 적극 지지하는 논리 역시 강력하며 설득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오늘날 시장에서 탈락한 개인이나 집단은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달리 구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홈 리스들이 적절한 예가 된다.
이럴 경우 사회 통합은 어렵다. 전통적으로 복지문제는 정부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흐름에 따라 국가가 과거처럼 시시콜콜 끼어들기가 힘들게 되었다. 이에 비해 시장을 매개로 한 기업의 영향력은 가공할 위력으로 커졌다. 특히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로 기업은 개별 국가나 정부 규제로부터 거의 무제한적인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래서 기업이라는 리바이어던이 통제의 고삐를 벗어나 세계 질서를 좌지우지할 지 모른다는 우려까지 제기된다.
더불어 사는 사회 이끌기를
실제로 우리 주변을 한번 둘러 보라. 일자리, 아파트, 가전제품, 교육, 치료, 심지어 죽음으로 이르는 길목까지 거대 기업이 버티고 있다. 기업에 의한 인간 지배가 가능한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기업이 스스로 앞장서는 사회적 책임 경영은 현재의 국면을 타개할 대안이 된다.
보다 많은 기업이 사회의 어두운 곳에 주목해야만 시장 만능으로 치닫는 우리 사회가 더불어 사는 사회로 갈 수 있다. 개발시대, 수많은 가난한 한국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기업으로 커왔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 땅의 재벌 기업은 더욱 그래야 마땅하다.
김동률 KDI 연구위원·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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