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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인터뷰] 아라이 신이치 이바라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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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인터뷰] 아라이 신이치 이바라키대 명예교수

입력
2010.06.20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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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조약 식민 지배에 대한 해석 통일이 교과서·독도 문제 등 역사 화해의 출발점"

최근 한달 남짓 사이 그를 두 번 만났다. 모두 취재현장에서다. 지난달 10일 '한일병합 100년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이 서울과 도쿄(東京)에서 동시 발표됐을 때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 이바라키(茨城)대 명예교수는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도쿄 일본교육회관에서 기자회견에 임했다.

보름 뒤 도쿄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역시 '한일병합 100년'을 주제로 열린 한일 의원 간담회에서는 주제발표를 했다. 아라이 교수는 두 행사에서 한결 같이 "한일기본조약 제2조의 해석 차이야말로 식민지 지배를 둘러싼 양국 역사인식의 거리를 보여주는 원점"이라며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진정으로 반성하고 한일 새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이 해석을 수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22일 한일기본조약 조인 45주년을 앞두고 도쿄에서 아라이 교수를 만나 조약 해석은 왜 달랐던 것인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들었다.

-한일강제병합의 해석이 엇갈리는 대목은 한일기본조약의 어느 부분입니까.

"한일기본조약 제2조의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부분입니다. 한일조약은 한국어, 일본어, 영어로 작성됐는데 한국어 조문의 '이미 무효'를, 일본어 조문에서는 '이제는 무효'라는 다른 의미로 썼습니다. 조약 체결 당시부터 한일병합조약과 관련해 일본은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 성립해 한국정부가 수립되는 시점에서 무효가 됐다며 그 이전까지는 유효했다는 해석을 했고 한국은 체결 시점에서 벌써 무효라는 원천무효로 해석을 했다는 말입니다. 영어 조문은 'already null and void'로 돼 있습니다."

-한일기본조약이 한국어, 일본어뿐 아니라 영문으로 정문(正文)이 작성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한일기본조약에는 해석이 서로 다를 경우 영문에 따른다고 명기돼 있습니다. 일본어는 일본에서, 한국어는 한국에서 권위를 갖지만 영어 정문이 있기 때문에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일본어 조문과 한국어 조문의 해석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영어 정문을 일부러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already'를 둘러싼 해석 차이인데 이 단어는 어떻게 결정된 것입니까.

"한일기본조약은 6월20일 서울서 가조인한 뒤 22일 일본에서 정식 조인합니다. 외교문서 공개가 불충분해 정확한 상황을 알긴 어렵지만 조약을 가조인하기 위해 당시 시나 에쓰사부로(推名悅三郞) 일본 외무장관이 서울로 가서 19일 이동원 당시 한국 외무장관과 청운각에서 비공식 회담을 엽니다. 거기서 일본이 'already'를 처음 제안하고 이를 한국이 받아들여 다음 날 가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측이 준비한 조약문 초안에는 이 단어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일본이 한일강제병합조약을 한국 정부 수립 이후 무효로 해석하려고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식민지 지배는 당시에는 법적으로 유효했다는 것을 양보하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편한대로 해석할 수 있는 영어 단어를 넣으려고 한 것입니다. 식민지 지배를 해서 좋았지 않은가, 일본이 좋은 일 하지 않았나 하는 의견이 특히 당시 윗사람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배려로 한국은 저렇게, 일본은 이렇게 해석하는 그런 모호함을 두기 위해 'already'라는 단어가 들어간 영어 조문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지금 한일의 해석을 일치시키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한일은 정부 차원에서 역사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양국 역사인식의 차이는 2001년 교과서 문제로 주목 받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공동연구가 시작됐습니다. 6년 동안의 공동연구 끝에 3월에 2차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중국과 일본도 2006년부터 비슷한 연구를 시작해 올해 1월 보고서를 냈습니다. 두 가지를 비교해 읽으면 한일 연구는 의견 대립으로 성과가 거의 없는데 반해 중일 연구는 성과가 있었습니다. 어디가 다른 걸까요. 한일 근대사의 경우 기본적 문제는 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것입니다. 중일은 침략전쟁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고요. 중일의 경우 1972년 중일 공동성명에서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 책임을 인정하고 그 내용을 문서에 명기했습니다. 하지만 한일은 한일기본조약에서 서로 자기 형편에 맞게 다르게 해석하는 선에서 타협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역사연구에서도 의견이 좁혀질 리가 없는 것입니다. 교과서 문제뿐 아니라 여러 문제가 한일기본조약 때문에 발생합니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는 아무 문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 때문에 해석을 통일해야 합니다."

-해석을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일병합조약의 성립에 대해서는 외교사, 국제법 전공자 중 당시 국제법으로 보면 유효하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저는 당시로서도 불법이라고 생각하지만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일본 정부가 해석을 바꿀 의지만 있다면 한일조약 이후에 성립되긴 했지만 '조약법에 관한 빈조약'(1967년)의 정신에 따르는 것으로 해석을 충분히 일치시킬 수 있습니다. 통상 조약의 해석을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조약 재체결을 생각할 수 있지만 국제적으로 매우 드물어서 거의 불가능합니다. 한일기본조약은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한국만 인정하고 있으므로 북일 국교정상화가 되면 조약 내용을 바꾸지 않을 수 없는데 이때 일치시키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지만 북일 국교정상화가 언제 될지 불투명합니다. 그래서 3개의 정문 중 최후의 권위를 갖는 영어 조문의 'already'라는 단어는 그대로 둔 채 그 해석을 일치시키는 방법을 택할 수 있습니다. 국회 의결은 일본에서는 보수파의 반대로 거의 어렵습니다. 가장 좋은 것이 총리 담화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외무 당국끼리의 합의로도 가능합니다. 빈조약에서는 조약 해석 때 당사자 사이에 이후 성사된 합의를 보충 수단으로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무라야마(村山)담화나 무라야마 총리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 김대중_오부치 공동선언, 북일 평양선언 등에서 식민지 지배를 반성ㆍ사죄하고 있습니다."

-한일지식인공동성명 참여자를 늘려 일본 정부에 한일조약 해석 변경을 요청하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참의원 선거 결과가 나온 뒤인 7월말까지 한일 500명씩 1,000명의 서명을 모아 일본 정부에 요청하려고 합니다. 8월15일 총리 담화를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당장 총리 담화가 나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한일 의원들이 이 문제 협의를 시작했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한일 역사화해는 가능한 것입니까, 그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일기본조약의 해석 통일이 우선 필요합니다. 그것이 실현되면 큰 분기점이 될 것입니다. 독도문제의 경우 일본 외무성은 러일전쟁 전의 여러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한국이 이 문제를 인식한 것은 이미 외교권을 뺏긴 1906년이었습니다. 결국 독도문제도 역사문제입니다. 1965년 조약의 해석 통일로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다면 영토, 어업문제도 양국이 다투지 않고 이야기로 풀어갈 수 있다고 봅니다. 위안부, 군인ㆍ군속, 피폭자 등 식민지 지배 피해자들의 청구권 문제도 가장 기본적인 것은 식민지 지배가 유효인지 무효인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식민지 지배의 해석이 모든 한일 과거사 문제의 배경에 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2차대전 전쟁책임, 홀로코스트 문제를 연구해온 서양사ㆍ국제법학자인 아라이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세계에 알린 주인공이기도 하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군위안부 문제를 실명 증언한 뒤 이듬해 도쿄에서 열린 위안부강제연행문제 국제공청회의 실행위원장을 맡았다. 일본의 전쟁책임자료센터를 만들려고 했지만 돈이 모자라 이바라키대 경리과에 가서 퇴직금을 미리 달라고 할 참이었는데 이 일로 200만엔이 모금돼 센터의 밑거름이 됐다. 아라이 교수는 "내가 지금 84세인데 다음 세대로 이 문제를 넘기고 싶지 않다"며 "한일간 차이도 있지만 함께 동아시아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 아라이 신이치 이바라키대 명예교수 약력

▦1926년 도쿄 출생

▦1947년 도쿄대 문학부 졸업, 주오코론(中央公論) 입사

▦1974년 이바라키대 교수(서양사ㆍ국제관계사)

▦1982년 역사학연구회 위원장

▦1991년 이바라키대 명예교수, 스루가다이대 현대문화학부 교수

▦1993년 '일본의 전쟁책임자료센터' 설립

▦2001년 스루가다이대 명예교수

▦현재 이바라키대ㆍ스루가다이대 명예교수, 일본의 전쟁책임자료센터 공동대표

▦저서 등

도쿄=글·사진 김범수특파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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